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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박스 Oct 22. 2023

박스를 넘는 운동?

'분명 봉을 드는 운동인 줄 알았는데, 박스를 넘는 운동인가?'


'*BOX'라는 간판을 쳐다보며 크로스핏 체육관 입구에 들어설 때였다. 나는 ‘박스를 넘는 운동이라면 잘 안 맞겠다’고 생각했다. 이름처럼 체육관 안에 박스가 쌓여 있었다. 체험 수업에 참석한 나는 박스를 넘나들 생각을 하니 귀찮았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수업 내내 박스는 등장하지 않았다. 만약 그날 프로그램에 박스 점프가 있었다면 지금 이렇게 크로스핏 이야기를 쓰고 있진 않을 거다.


‘박스(Box)’가 크로스핏에서 '체육관'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운동을 시작하고 반년 후엔가, 그보다 더 뒤엔가 알게 됐다. ‘박스’가 뭔지도 모르고 ‘박스’에 다녔다니 의아하겠지만, 사실 첫 6개월은 박스고 뭐고 여유로운 프로페셔널리스트처럼 크로스핏을 즐길 처지가 아니었다. 그날 당장 해야 할 동작을 정신없이 몰아서 해내고 나면 집에 와서 뻗어버리기 일쑤였다. 안 그만두고 다닌 게 이상할 정도다. ‘박스’라는 단어가 궁금해진 건 내 몸이 아주 조금 크로스핏에 적응해서 ‘살만 하다’는 느낌이 드는 단계에 들어섰을 때로 기억한다. 어떤 회원이 “우리 박스는...”하는 소리에 ‘박스?’하는 물음표가 문득 머리 밖으로 툭 튀어 올랐다. 그날 검색창을 두들긴 후에야 대개 체육관이 네모난 창고형 건물인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비로소 ‘나 오늘 박스 가’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크로스피터(Crossfitter)가 된 날이었다.


크로스핏은 용어의 바다다. 생소한 단어도 많고, 익숙한 사람 이름을 가져와 프로그램 명으로 붙여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한 경우도 있다. 새로운 크로스핏 용어를 알게 될 때마다 운동 기획자의 브랜딩 센스를 엿보는 기분이다. 센스까지는 좋은데, 문제가 있다. 나는 (처음에도 그랬지만 여전히) 단어를 못 외운다는 사실이다. 나 몰래 마흔에 적응한 뇌가 벌써부터 뒤돌아서기만 해도 단어를 분실하는데, 기획인의 센스가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오늘 할 운동이 적힌 화이트보드 앞에서 뇌피셜 모드를 동원해 나름대로 아는 척 해석하고 있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느 집단에서나 솔직하게 모른다고 얘기해도 되는 횟수는 제한적이다. 무난한 사람과 성가신 사람의 경계를 가르는 보이지 않는 선이란 게 있는 법이다. 모 나지 않은 사회생활이란 걸 포기하면 쉬운데, 괜히 피곤하게 산다. 남들 다 아는 용어를 계속 물어보며 운동 시간을 지연시킬 순 없는 노릇이라 혼자서 눈치껏 이해하고, 온 힘껏 운동하고, 온 몸껏 근육통을 앓곤 했다.


'바벨(Barbell, 바, 원판, 조임쇠로 구성된 것)'이라는 용어를 몰라 한동안 '봉봉'거리기도 했던 나는 ‘바벨(Barbell)’과 ‘덤벨(Dumbell)’을 헷갈리는 경우도 흔했다. 이제껏 ‘헬스’는 내게 지루한 종목이었기에(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다) 기본적인 체력 단련 기구명도 몰랐다. '덤벨 하나씩 가져오세요'라는 코치님 말에 바(Bar)가 비치된 쪽으로 가다가 슬그머니 방향을 틀곤 했다. 내가 걷는 쪽이 다른 회원들이 나아가는 쪽과 다르다는 걸 눈치채고 자연스럽게 목표 지점을 변경해 덤벨을 집어 왔다. 스무쓰 한 뒷걸음질 실력만 늘어가는 것 같았다.


웬만한 건 어떻게든 앞에 선 회원을 치팅해서 이해했지만 코치님의 '?!;@와드?#%?&',라는 말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자꾸만 어쩌고 와드, 저쩌고 와드라고 했다. ‘와드’라는 단어를 겨우 건져 들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듣고 나서 생각하길, 요즘 유행하는 줄임말이거나 인터넷 용어, 특히 게임 용어일 거라 여겼다. 그들만의 대화는 배경 음악 같았다. ASMR인가. 직접 따라 말할 수는 없는 소리였다. 같이 듣고 있는데, 분명 들었는데, 벌써 저만치 흘러간 부분이 많았다. 새로운 용어를 모르면 뒤쳐진다. ‘집에 가서 찾아봐야지.’ 검색창에 ‘게임’과 ‘와드’를 나란히 입력하고 엔터를 눌렀다. 왜 ‘크로스핏 용어‘라고 검색할 생각을 애초에 하지 못했는지 아리송하다. 정말 게임 용어라고 확신했나 보다. 처음에는 ‘검색할 수 없는 단어’라고 나왔다. 여러 번 시도 끝에 겨우 찾아낸 뜻은 'Workout Of the Day(오늘의 운동)'였다. 이것의 첫 글자를 딴 줄임말이 '와드(WOD)'인 것이다. ‘나만 모르는 게임 얘기를 하는 게 아니었군.’ 겉보기엔 반응 없는 회원, 알고 보니 반응할 수 없는 회원의 속사정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그날의 운동 프로그램(와드)은 언제나 박스 전면에 있는 화이트보드에 적혀 있었다. ‘데드 리프트(Dead Lift)’, ‘스모 데드 리프트(Smo Dead Lift)’, ‘푸시 프레스(Push Press)’, ‘푸시 저크(Push Jerk)’, ‘파워 스내치(Power Snatch)’, ‘행 파워 스내치(Hang Power Snatch)’, ‘오버헤드 스쾃(Overhead Squat)'.... 무슨 말인지 정말 정신없고 복잡했다. 여기에 더해 'For Time', 'EMOM', 'AMRAP', 'AFAPAs', '1RM'.... 어떡하라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크로스핏은 정말 불친절한 운동이었다.


어떤 날엔 사람 이름도 적혀 있었다. ‘린다(Linda)? 왜 사람 이름이 적혀있지?’ 처음에는 크로스핏이라는 운동 방식에 적응하느라, 운동 기구 이름에 적응하느라, 운동 제목에까지 눈길을 줄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 차츰 와드 제목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해서 봤더니 '신디(Cindy)', ‘엔지(Angie)', '프란(Fran)' 등 사람 이름이 곧 제목인 경우가 종종 있었다. 검색 결과, 여성 이름의 경우 크로스핏에 공헌한 여성 크로스피터의 이름을 딴 것이고, 남성 이름의 경우에 전쟁 등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이의 이름을 붙인 것이었다. 각각 ‘걸 네임드 와드(Girl Named WODs)’와 ‘히어로 와드(Hero WODs)’라 부르며 둘을 합쳐 ‘네임드 와드(Named WODs)’라고 했다. 네임드 와드에 관한 내용을 모를 당시 혼자만의 생각으로 크로스핏 동작의 초성을 연결해서 지은 이름일 거라 짐작했다. 아니면 그냥 재밌으라고 별 뜻 없이 사람 이름으로 지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했다. 크로스핏을 하면서 혼자 소설을 쓰는 능력이 나날이 안드로메다에 가까워졌다. 어찌 됐건, '아, 오늘도 뭔 말인지 모르겠다. 앞사람 보고 하자. 살아서 걸어 나가자'라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여유롭게 크로스핏을 만끽하는 갓생을 꿈꾸지만 실상은 생존에 급급한 크린이의 시간이 수없이 반복됐고, 1년 반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우여곡절 끝에 박스가 돌아가는 루틴에 적응하며 알게 된 '크로스핏'이라는 운동은 시작할 때 알던 대로 바벨을 이용한 역도 훈련이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더불어서 맨몸 운동도 자주 했다. 크로스핏은 전신 운동 능력 향상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크게 근력(Strength), 역도(Lifting), 체조(Gymnastics) 등 3가지 종류의 훈련에 중점을 두어 맨몸 운동과 기구 운동을 병행하는 것이었다. 내가 다니는 박스는 요일별로 정해진 훈련 목적에 따라 총 50분의 수업 내용이 짜이는데, 그중 준비 운동을 10분, 근력 혹은 기술 훈련을 20분, 와드를 20분가량 진행한다. 하루는 바벨을 들고, 다른 하루는 철봉에 매달리고, 또 다른 날에는 박스를 넘거나 밧줄을 타고 오르는 전천후 아마추어의 시간에 홀려갔다.


오전 타임 크로스핏을 마치고 마트에 들러 장을 봐서 곧바로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를 데리러 교문 앞으로 가곤 했다. 운동복 차림에 나이키 보스턴 백을 사선으로 메고 한 손에 장바구니를 든 룩으로 출석 도장을 찍었다. 계절이 바뀌고 같은 계절이 돌아오는 동안 낯이 익은 마트 아주머니와 아이 친구 엄마가 종종 말을 걸어왔다. “운동 좋아하시나 봐요. 어떤 운동 다니세요?”라고 물으면 “크로스핏 해요”라고 답했다. 돌아오는 반응은 “그렇게 과격한 운동을요?”와 “크로스 뭐라고요?”라고 묻는 두 종류로 나뉘었다. 무지막지한 운동이거나 모르는 운동인 거다. 나도 내가 헐크들 틈새에 끼어서 크로스핏을 할 줄 몰랐고, 한 살, 두 살을 먹는 내내 하고 있을 줄은 더더욱 몰랐다. 역시 크로스핏은 도통 알 수 없는 운동인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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