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볼샷(Wall Ball Shot)*은 나랑 안 맞는다. 와드에 월볼샷이 있는 날은 아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대는 되는데 긴 날'이다. 요즘 검도에 푹 빠진 아이가 도장에 들어설 때마다 종종 하는 말이다. 수업이 1시간 반인 까닭에 검도가 좋아도 체력이 달려서 길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월볼샷을 하는 몇몇 날에는 기대는커녕 길게만 느껴질 때도 있다. 무거운 공을 힘껏 던지고 나면 그 공이 다시 내 손에 돌아와 있다. 방탈출 게임에서 영영 탈출을 못하는 기분이랄까? 어찌 보면 쓰러스터를 바벨이 아니라 공으로 하는 것과 같지만, 개인적으로 쓰러스터와는 아주 다른다는 느낌을 받는다. 월볼샷이란, 때로는 내게 운동이 아닌 노동이 되는 지점이다.
*[월볼샷(Wall Ball Shot): 쉽게 말해서 공을 벽에 던지는 것. 가슴 높이에서 메디신 볼(Medicine Ball)이라 불리는 공을 든 채로 스쾃 자세로 앉았다가 일어남과 동시에 일정 높이의 벽에 던지는 것을 반복하는 동작.]
비 오는 날에는 운동하기 싫다. 비 내리는 날 와드에 월볼샷이 있으면 박스에 나가지 않기도 했다. 그렇다고 본래부터 비를 싫어한 것은 아니다. 지금도 비 오는 날 자체는 좋아한다. 어렸을 때는 빗소리를 더 크게 듣고 싶어서 우산을 아예 머리 위에 찰싹 붙이고 다녔다. 우산이 귀에 가까울수록 빗소리가 더 크게 나기 때문이다. 감정 기복이 심한 사춘기 때는 우산도 안 쓰고 비를 맞고 다니기도 했다. 머리 위에 곧바로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우산에 기대지 않은 진짜 소리를 듣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도 없었다. 어렸을 때는 몰랐던 용어이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ASMR’을 들으면 마음이 평온해졌던 거다. 그랬던 내가 출산 후에 달라졌다. 어르신의 입에서 나오는 '오늘은 비가 오려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됐다. 비가 오는 날에는 이상에게 몸이 찌뿌둥했다. 인간의 육체가 햇빛을 받지 못하는 것과 공기 중에 수분이 많은 것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했다. 이런 날에는 창가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비 오는 풍경을 감상하는 일이 박스에 나가서 에너지를 불사르는 일보다 나아 보인다.
그렇다 할지라도 최근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화목반 수영을 시작했기 때문에 월, 수, 금 중 월볼샷이 예정돼 있어도 크로스핏을 건너뛸 수 없다. 하루를 빠지고 나면 크로스핏을 일주일에 두 번 밖에 못한다. 나에게 크로스핏을 주 2회만 가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 돼 버렸다. 그래서 비가 오는 월, 수, 금 중에 월볼샷 와드가 정해져 있으면 울며 겨자 먹기로 나가야 한다. 내 아이가 지난 학기에 방과 후 수업으로 '창의 논술'을 들었을 때의 일이다. 공개 수업이 열려서 나도 참석했다. 속담이나 격언 등을 수업 중에 알려주는데, 그날 배운 말이 '울며 겨자 먹기'였다. 선생님이 "이건 어떤 상황에 쓰이는 말일까?" 하니, 아이가 외쳤다.
"나는 창의 논술을 울며 겨자 먹기로 다녀!"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내가 어미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었다. 그날 왠지 마스크로 얼굴을 가려야 할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마스크를 쓰고 갔었다. 정말 잘한 일이다. 이번 학기에는 논술 수업을 뺐다. 나는 내 맘대로 월볼샷을 뺄 수가 없다. 아이가 창의 논술 수업을 억지로 듣던 마음과 내가 월볼샷을 억지로 하는 마음이 많이 닮아 보인다.
코치님이 "오늘부터 노랩 금지입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노랩(NoRep, No Repetition)'에서 '랩'은 동작 횟수를 뜻한다. 운동 중에 정확한 동작이 아니면 코치나 심판이 '노랩'을 외치는데, 노랩으로 간주된 것은 횟수에 포함하지 않는다. 코치님이 회원들을 둘씩 짝 지어줬다. 한 명이 월볼샷을 하면 나머지 한 명이 심판 역할을 해서 숫자를 세는 것이다. 이때 메디신 볼(Medicine Ball)**이 벽의 일정 높이에 그어진 선을 넘지 못하면 노랩으로 간주된다.
"하나, 둘, 다시 둘, 셋, 다시 셋......."
코치님은 코치님의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노랩을 외칠 수 있지만 같은 처지에 있는 회원이 매의 눈으로 노랩을 찾아내면 답이 없다. 만약 정해진 횟수가 20회라면 계속 노랩이 나올 경우 40회를 던지게 되는 수도 있다. 그때 나는 박막례 할머니를 떠올렸다. '이대로 죽을 순 없다!'
**[메디신 볼(Medicine Ball): 운동용으로 던지고 받는 무겁고 큰 공. 가죽으로 덮인 이 공의 지름은 약 45CM이며, 무게가 다양함.]
오늘 오전 수영장에서도 노랩과 같은 상황을 맞닥뜨렸다. 수영 시작 6주 차에 접어들었고, 평영 발차기를 배웠다. 평영은 신세계였다. 자유형과 배영이 생각보다 잘 돼서 2주 만에 배웠다. 물론 자세나 호흡이 엉망일지 몰라도 앞으로 나가기는 해서 수영이 어렵다는 생각은 없었다. 평영은 달랐다.
'이게 바로 수영에서 말하는 뒷걸음질 영법이구나!'
수심 0.7M 유아풀에서 10CM 앞으로도 못 나가고 버둥댔다. 앞으로는커녕 무릎을 접을 때마다 몸이 뒤로 밀려났다.
"저는 뒤로 가는 법을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수영 코치님이 말했다.
유아풀에서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평영이란 게 있다더라'라는 다리 놀림만 하고 있던 나는 정말로 수영 어린이였다. 여기에서도 저기에서도 엎치락뒤치락 배워나가는 중인 운동계의 어린이다. 그래도 노랩이 쌓여서 랩이 되고, Scale D가 쌓여서 Rx'D가 되는 것 아닌가? 지금까지의 몸부림은 노랩이 아닐 거다.
남편이 대뜸 목표가 생겼다고 했다. 달리는 거리를 점차 늘린 뒤 때가 되면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나가겠다는 것이었다. 주말마다 10KM를 뛰던 남편에게 계속 뛰어야 할 목표가 생긴 것이다. 목표를 정한 그가 평일이 되자 평소보다 일찍 출근했다. 몸에는 러닝복을 착용하고 한 손에는 갈아입을 옷을 챙겨서 나갔다. 그가 월수금마다 회사 근처 천변에서 5KM를 뛰고 나서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나에게도 운동을 해야 할 중요한 목표가 있다. 아이를 안아 올릴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바벨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거다. 들고 싶은 무게를 마침내 드는 것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말이다. 초등학교 1학년이 된 아이가 두 팔 벌린 채 엄마 안아줘, 하고 기다리면 주저함 없이 안아 올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아이가 종종 안아달라고 하는 장소가 있다. 지하철 플랫폼이다. 언젠가 한번 지하철이 오기를 기다리던 중에 안아준 적이 있다. 그때 잠깐 웃긴 얘기를 했던가 웃긴 노래를 불렀던가 그랬다. 그 순간이 마음에 새겨졌나 보다. 엄마 품에 쏙 안겨 재미있고 따뜻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에게 뽐내고 싶어 하는 무언의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그 뒤로 지하철 플랫폼에만 서면 엄마 안아줘, 하고 팔 벌린다. 그런 순간에는 유아기를 벗어난 다리 길쑴한 어린이일지라도 단숨에 꼭 안아주고 싶다. 아이는 그런 기억을 포개서 어른이 된다. 중강도 근력 운동을 꾸준히 하면 아이가 3학년이 될 때까지는 안아 줄 수 있지 않을까? 4학년쯤 되면 도리어 아이 측에서 안아달라고 하지 않을 거다. 제법 형아가 됐다고 우쭐댈 테니 말이다. 앞으로 2년 남았다. 힘이 달려서 못 안아 주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근력 운동을 하는 남성 중에는 내 여자를 가볍게 안아 올리는 로망을 갖고 있는 경우가 있다.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그날을 위해 운동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들어 올린다는 것은 자신감의 표출이자 무한한 애정의 표현이다.
나의 크로스핏 일상은 아직 덜 숙성됐다. 농익으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그렇다고 이 시간을 노랩이라 말할 수는 없다. 오늘도 15LB 바에 원판을 한 장, 두 장 끼운다. 내 존재 덩어리에도 살아갈 햇수만큼의 원판이 더해질 거다. 나이만큼 삶의 무게가 더해질 때, 잘 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실전이 노랩으로 간주되지 않게 오늘도 박스에서 예행연습 중이다. 노랩은 무슨....... 내가 보기엔 몽땅 다 랩, 예스 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