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리기 위해 가장 먼저 넘어야 하는 관문은 이것이었다. 실토.
나는 내 우울증을 완벽하게 숨겼다. 남편에게 나는 아마 세상에서 가장 발랄한 인간이었을 것이다. 방방 뛰어다니는 나를 보고 웃는 남편이 좋았다. 비록 건강하지 못하지만 해사한 사람. 뭐 이런 가면을 만들어 쓰고 있었다. 남편이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선택한 나다. 그런 내가 이렇게 엉망인걸 드러낼 용기는 없었다.
혼자 이겨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우울증이 마음의 감기라면 자연스레 나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게다가 남편은 내가 10년 만에 행복감을 느끼게 해 준 사람이었다. 적어도 남편과 함께 있는 시간은 절망스럽지 않으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게 큰 착각이었음을 창틀에서 내려와서야 깨달았다. 10년 동안 앓는 감기는 더 이상 감기가 아닌 것이다.
이제는 가면을 벗고 방패를 내리고 화장을 지우고 우울한 나를 알려야 한다. 몸도 엉망인데 정신도 엉망진창이라고 드러내야 한다. 그래야 나를 살릴 수 있다. 그걸 아는 것과 실제로 오래된 껍데기를 벗고 살갗을 보여주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런 장면을 상상만 해도 수치심과 두려움에 숨이 막혔다.
‘상담을 받겠다고 하면 남편은 나를 어떻게 볼까?’
일단 “여보” 하고 불렀는데 그다음 말이 나오질 않았다. 사람을 불러놓고 아무 말도 없이 미적거리는 나를 가만히 기다리는 남편. 저 담담한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 자신이 없었다.
아니, 방금 뛰어내리려고 한 마당에 나는 도대체 뭐가 무서운 걸까. 딱 한마디면 된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다시 창틀에 올라가면 그때는 정말 끝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떨어지면서 후회하겠지. 지긋지긋한 후회.
“여보, 나 우울해.”
내뱉고 보니 별거 아닌 말이었다. 나 배고파, 나 배불러 이런 말과 다를 것도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도 눈물이 자꾸 흘러나왔다. 그동안의 연기 덕분에 남편은 우는 나를 덤덤하게 볼 수 있었다. (추후에 남편은 ‘아내가 조금 우울감이 있는 모양이다’ 가볍게 생각했노라 고백했다.) 간신히 울음을 누르고 상담을 받아야겠다고 전했다. 전에 남편이 상담소에 다녔었는데 그게 내내 부러웠었다. 이제는 내 차례다. 눅눅한 가면을 벗을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