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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훈 Oct 03. 2020

"지훈아, 회사 다니는 거 안 힘들어?"

 "지훈아, 회사 다니는 거 안 힘들어?"

 어머니는 산책을 하는 중에 나를 바라보며 물으셨다. 그 말이 내게는 '지훈아, 엄마가 너 힘든 거 다 알아.'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어머니도 다 알고 물으셨을 것이다. 당시 내가 회사에 다닌 지 첫 주가 지난 시점이었고, 돈을 버는 게 진짜 쉽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때였다. 

 "엄마, 나 버티기 참 잘 한대."

 나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회사에서 선배들로부터 유일하게 받은 칭찬을 언급했다. 

 "너희 형제가 예전부터 참을성이 좋았지."

 버티기를 잘한다는 말에 어머니는 안심하는 듯했다. 어차피 나도, '내가 어디까지 욕을 먹을 수 있나' 회사와 승부를 볼 태세였다. 신입 1년 차 때는 정말 일에 익숙하지도 않았고,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교육컨설팅의 특성상 적은 인원이 멀티의 능력을 갖고 일하는 곳이었고, 나에게도 그런 역량을 빠르게 요구했다. 내가 2년 차부터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했기에, 1년 차 때는 무지막지한 비난과 욕을 먹어야 했다. 

 시간이 지나 나에게 너무 심했다며 사과를 하고 오해도 푼 선배들도 있었지만, 그때는 뭐 이렇게 말을 함부로 하는 나쁜 인간들이 다 있나 싶을 정도로 상처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어차피 그런 사람들과 업무 외에 인간적으로 연을 이어갈 건 아니라서 욕을 먹으면 욕을 먹고, 잠시 후에 아무 일도 없는 듯 웃으며 버텼다. 내가 일을 못하는 건 맞았기에 자존심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자존심은 스스로 투지를 불 태울 때는 도움이 된다. 그러나 경험이 없을 때 자존심을 내세우는 것만큼 어리 석은 일도 없다. 하나도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실 나는 25살의 나이에 졸업을 하기 전부터 취업을 할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지훈아, 대학원만 잘 졸업하면 형이 연구소 소개해 줄게."

대학교에 다닐 때 공모전을 함께 했던 선배가 있다. 그 선배는 자신의 일처럼 내게 인생 조언도 해주고, 나름 안정적인 커리어도 설계해 주었다. 요즘은 더 심해졌지만, 당시에도 취업난은 여전했고 선배의 저 말이 내게는 달콤하게 들렸다. 

 '그래, 공부하는 거 재밌고 연구소도 재밌을 것 같으니까 대학원 먼저 가자.'

 4학년 2학기의 막바지까지 내 진로는 거의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설정한 진로는 대학원 면접을 본 당일에 크게 흔들렸다. 나보다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 더 많이 준비한 지원자들을 보며 합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도 했지만, 학업을 왜 연장해야 할지 이유를 찾지 못했다. 



 "지훈아, 엄마가 대학원까지는 어떻게 지원해 줄게."

 대학원을 졸업하고, 연구소에 들어가는 안정적인 커리어를 밟겠다는 내 말에 어머니는 웃으며 대답하셨다. 그래도 그 대답이 자주 마음에 쓰였다. 우리 집은 내가 어릴 때 많이 가난했고, 가난을 벗어나고자 부모님이 많이 애쓴 덕분에 기본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내가 대학원에 들어간다는 것은 부모님의 많은 애씀을 더 필요로 하는 것이었고, 그게 내 양심에 맞지 않았다. 

 "아빠, 나 면접을 두 시간이나 봤어. 원래 면접을 이렇게 보나?"

 그 날로 늦은 새벽까지 여러 회사에 이력서를 제출했고, 그중 가고 싶은 회사의 면접 제안이 들어와 면접을 봤다. 이렇게 글을 쓰고 말을 하는 업을 가질지 당시에는 몰랐지만, 그때도 한참 말을 잘할 때였다. 어떤 압박 질문에도 술술 대답하는 나를 두고 면접진들은 한참이나 면접을 진행했었다. 

 "면접 봤다고? 그런데 두 시간 면접 보는 경우는 없는데? 합격할 것 같은데..."

아빠의 예상대로 다음 날 나는 회사 합격 통보를 받았고, 그렇게 첫회사를 다니게 되었다. 



 세상을 더 알고 싶었고, 사회에 나가 더 많이 깨지고 싶었다. 그런데, 사회에 나가 더 많이 깨지고 싶다는 열망만 하늘에 전달이 되었는지 선배들로부터 너무 많이 깨졌다. 쿠쿠다스가 입안에서 탈탈 털리듯이 정신이 정말 탈탈 털렸다. 새벽 4시에 잠이 깨면, 출근해야 한다는 긴장감에 잠을 못 잔적도 여러 번이다. 

 그래도 부모님에게 특별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금요일 저녁에 아빠와 짜장면에 탕수육을 시켜 고량주도 한잔하고, 주말에 삼겹살에 소주도 사드리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아들, 회사 다니는 거 쉽지 않지? 선배들이 잘해줘?"

 아버지는 내게 술을 따라주며 가끔씩 묻고는 했다. 

 "적응하는 중이야. 괜찮아."

 회사에 들어가 월급을 받다 보니, 돈을 버는 게 정말 쉽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아무 일 없는 듯 집에 들어와 가족에게 웃는 것 역시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가난이 끝없이 이어지던 시절, 식당에 나가 일을 하고 들어와 고되다고 얘기하셨던 어머니, 옥탑방에 살며 오랫동안 회사생활을 지속했던 아버지의 무게가 내게도 느껴졌다. 더군다나 우리 부모님은 가난과 자식들까지 업고 가느라 더 힘든 삶을 버텨내셨다. 

 가끔 나는 회사생활이 너무 힘들 때면, 혼자 심야 영화를 보고 가로등이 있는 거리를 걸었다. 

  '엄마, 아빠도 힘들 때 이렇게 혼자 걸었겠구나.'


 한편으로는 이렇게 일찍 세상을 알아갈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우리 부모님이 겪은 청춘의 무게를 빨리 걸어가고, 그 시절을 조금은 공감하며 함께 술잔을 기울일 수 있다는 것에 고마움도 느꼈다. 때로 뒤를 돌아보며, 우리 집이 조금 여유 있어 유학도 가고, 세계의 문학을 공부하는 기회가 내게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 때도 있다. 물론, 그 길도 설레고 가슴이 뛰는 일이지만,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말을 하는 사람으로서 사람을 이해하고, 힘들 때 위로를 할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에도 벅찬 마음을 느낀다. 

 "엄마, 아빠는 요즘 안 힘들어?"

 그리고, 지금은 우리 부모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어른이 되었음에 또 한 번 고마움을 느낀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아픔은 지워지는 게 아니라 함께 가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했지만, 그 아픔 덕에 우리 부모님의 마음을 공감하게 되었다. 누군가의 마음을 공감할수록 내 어깨에 짋어지는 무게의 값도 많이 들지만, 그런 행동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무게를 덜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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