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쯤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말이다. 그 얘기를 몇몇의 지인들에게 전해 들으면서 그다지 공감하지는 못했지만 그냥 웃었던 걸로 기억한다.
농경사회에서 전해 내려오던 남아선호 사상이 산업사회와 정보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흐릿해졌고 이제는 아들보다 딸이 더 좋다고 하고, ‘딸바보’라는 말은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지인들과의 모임에서 가벼운 농담으로 자녀의 성별에 따라 점수를 매기기도 하고, 올림픽에서 따는 메달의 색깔을 정하기도 하는데 항상 딸이 있어야 점수가 올라가고 메달의 등급이 올라간다.
임신과 출산을 경험한 친구들은 손녀를 원하는 시부모님은 세련되고 시대의 변화를 잘 받아들이는 유연한 사고를 가진 사람으로 묘사하고, 손자를 원하는 시부모님은 구시대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으로 묘사하곤 했다. 심지어 대놓고 아들을 바라는 시부모님은 케케묵은 아들 선호 사상을 가진 꼰대로 표현하는 것도 보았다. 부모님 세대뿐 아니라 부부들에게서도 비슷한 상황을 많이 접했다. 예비 부모들은 하나같이 곧 태어날 아이가 딸이었으면 좋겠다고 얘기한다. 아들을 낳고 싶다고 공공연하게 말하는 젊은 부부는 찾아보기 힘들다. 정말로 그런 건지, 아들 낳고 싶다고 얘기하면 ‘남아선호 사상’을 가진 구시대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으로 비칠까 봐 속마음을 숨기는 건지는 당사자만이 알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사람들이 딸을 낳고 싶다, 아들을 낳고 싶다는 얘기를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만 속마음을 어디까지 표현하느냐는 개인의 자유이므로 내가 뭐라고 할 건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요즘은 왜 그렇게 딸이 좋다고 하고, 너도 나도 딸을 낳고 싶다고 얘기하는 걸까?
성별은 여자(딸), 남자(아들) 2종류이므로 본인의 선호도에 따라 원하는 성별이 다를 수도 있고, 자녀를 2명 이상 가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2종류 성별의 자녀를 모두 원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자녀 입장에서는 성별이 같은 형제(자매)가 있는 것이 좋다고 얘기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사이가 좋을 때의 일이고, 또 성인이 된 이후에는 상황이 비슷하고 가까이에 살아야 교류가 잦고, 서로에게 의지가 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남보다 못한 형제자매는 주위에서도 대중매체에서도 무수히 많이 보아왔을 것이다.
난 아이를 낳지 않기로 남편과 합의한 무자녀 부부이므로 지금도, 미래에도 딸은 물론 아들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나의 부모님에게는 딸이다. 그런데 난 성격상 그다지 애교가 많은 딸이 아니고, 그런 딸이 되려는 별다른 노력도 하지 않는다. 결혼 전에도 결혼 후에도 나와 부모님은 적당히 아름다운 거리를 유지하면서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서적인 친밀감은 높은 편이다.
난 내가 부모님께 할 수 있는 최고의 효도는 내 인생을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부모님은 두 분이 사이좋게 잘 지내시는 게 딸, 아들, 사위, 며느리 모두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런 딸이기에 딸이 좋다는 말, 특히 엄마에게 딸이 꼭 필요하다는 말이 그다지 공감이 되지는 않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자주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하면서 일상을 공유하는 나보다 12살 많은 지인이 있다. 아들 2명이 있는 50대 여성인 그녀는 남편과 둘이 주말 나들이도 자주 가고, 집 근처 식당으로 외식도 자주 다니면서 살고 있다. 아들 2명은 각각 학교와 직장으로 인해 다른 지역에서 살고 있다. 그녀를 보면서 딸이 없어서 허전하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고, 그녀에게 그런 얘기를 들은 적도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친구에게 “부부 사이가 좋으면 딸이 그다지 절실하지 않다”라는 얘기를 듣고 그녀(50대 지인)의 삶이 단번에 이해가 됐다. 그 친구 역시 아들만 2명(10살, 7살) 있는데, 사람들이 “늙으면 엄마에게는 딸이 있어야 한다”라고 셋째 낳으라는 얘기를 너무 많이 하는데 그 얘기가 너무 듣기 싫다고 했다. 친구는 자신의 아들들이 성인이 된 후 남편과 둘이 보낼 노후를 기대하고 있는데, 왜 자꾸 늙으면 딸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지 현재로서는 모르겠다고 했다.
그렇다. 부부 사이가 좋은 중년 여성은 딸이 그다지 절실하지 않은 것이다. 중년 여성의 감정 변화, 일상적인 소소한 얘기를 함께 할 배우자가 있으면 일상은 충분히 만족스러울 것이다. 대부분의 중년 여성은 남편과 잠깐만 대화를 해도 큰소리가 나고, ‘말해 뭐하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남편은 남의 편’이라고 허탈하게 웃으면서 얘기한다. 중년 여성들은 부부가 함께 나눠야 하는 일상적인 대화와 감정들을 남편과 함께 하지 못하니까, 딸에게서 혹은 친구에게서 찾는 것이 아닐까?중년 남성들은 감정을 표현하거나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 것이 서툴고 낯설고,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말 많은 남자는 별로다’라는 근거 없는 얘기를 가슴 깊이 새기면서 그저 묵묵히 일하고 , 가정에서는 사소한 감정에는 전혀 표정 변화 없는 그런 삶을 살아왔기에 부인의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는 대화 상대로는 역부족일 것이다. 그러니 중년 여성은 자신의 감정을 잘 이해해주고, 평범한 일상을 함께 하면서 어떤 얘기든 할 수 있는 딸이나 친구를 찾게 되는 게 아닐까?
물론 몸과 마음이 쇠약해진 부모가 자식에게 의지하고 기대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자식도 당연히 부모를 돌보아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꼭 딸이어야 하는 건 아닐 것이다. 과거에는 오로지 아들(며느리)이 부모를 책임지고 부양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아들(며느리)이 많던 적든 부모의 재산도 모두 상속받았고, 딸은 말 그대로 출가외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찌 된 상황인지 딸이 좋다고, 딸이 있어야 한다고 얘기하면서 재산은 아들에게 더 주면서 정서적인 위로는 딸에게 받길 원하는 걸까? 아들이 결혼을 할 때 거처(대개 방한칸)를 마련해 주던 관습이 지금은 억대의 집값으로 변질되었고, 딸은 그저 살림살이나 준비해서 결혼시키면 된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이 아직 많이 계신다. 이렇게 적은 비용으로 극대의 효과를 누리기 위해, 이렇게 만만하게 대하려고 딸이 필요하다고, 딸이 좋다고 얘기하는 걸까?
물론 부모님이 열심히 모은 재산을 누구에게, 어떻게 쓰시든 자식들이 관여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경제적인 지원은 아들에게 더 많이 해주시고 아들은 존재만으로 든든하다고 하시면서, 간병이 필요한 순간이나 정서적으로 위로가 필요할 때는 ‘감정 쓰레기통’ 역할로 딸이 좋다면서 딸을 찾는다면 딸들은 너무 서러울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무수히 많은 딸들은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 역할을 해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고, 그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근래에는 더 이상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 역할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책들도 많이 출간되었고, 주위에서도 엄마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관계를 재정립하려는 딸도 보았다.
한때 유행했던 ‘착한 며느리병’에 걸렸던 그 며느리들이 예전에는 ‘착한 딸병’에 걸렸던 게 아닐까? 하지만 대상이 숭고한 희생의 아이콘인 엄마이고, 본인이 딸이었으니 차마 부당하다고 생각지 못했고, 설사 생각했더라도 소리 내어 말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반대로 엄마와 딸이 영혼의 동반자처럼 너무 잘 통하고 쿵작이 잘 맞는 사이도 있다. 그들은 세상 어떤 친구보다 엄마(혹은 딸)와 얘기하는 게 재밌고, 편하다면서 모든 일상을 엄마(딸)와 공유하는 사람도 간혹 보았다. 그럴 땐 ‘내가 너무 무심한 딸인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내 건강하지 않은 관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이든 딸이든 성인이라면 부모로부터 정서적으로 독립을 해야 한다. 정서적으로 독립하지 않은 자녀가 가정을 꾸린다면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마마보이’만큼이나 위험한 것이 ‘마마걸’이라는 걸 주위에서 몇 번 목격했다. 장모님이 연락도 없이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방문하시고, 가정 일에 너무 관여를 많이 하시는 것이 괴롭다면서 “처갓집이 북한으로 이사 갔으면 좋겠다”라고 얘기하는 남성도 보았다. 다른 외국은 안 되고, 자유롭게 올 수 없는 북한이어야 한다는 얘기에 웃었지만, 그의 고충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인터넷 검색창에 <엄마와 딸>을 검색하면 나오는 젊은 엄마와 똑같은 옷을 입은 어린 딸의 사진들, 중년(노년)인 엄마와 성인 딸의 모습은 어떨까?
중년 여성들이 딸에게 너무 많은 것을 의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성인이 된 자식 역시 부모에게 너무 많은 걸 의지하면 안 된다. 성인이 된 후 인생의 대부분은 혼자 겪고, 혼자 감내하는 것이다. 인생의 동반자라는 배우자가 있어도 모든 것을 배우자와 함께 할 수는 없다. 배우자도 어디까지나 동반자이다. 함께 가꾸고 일궈나가는 것이지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이는 아니다. 배우자와 함께 할 수 없는 시간은 혼자 감당해야 한다.
누구에게든 상대방이 부담스럽거나 불편할 정도로 한쪽이 너무 의지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거동이 불편하거나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은 예외이다.) 인간관계의 이상적인 모습은 같이 있으면 둘 다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관계, 그리고 따로 있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은 관계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