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발목을 잡힌 운명의 문장들- 모순, 양귀자
그랬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내가 내 삶에 대해 졸렬했다는 것, 나는 이제 인정한다. 지금부터라도 나는 내 생을 유심히 관찰하며 살아갈 것이다. 되어 가는 대로 놓아두지 않고 적절한 순간, 내 삶의 방향키를 과감하게 돌릴 것이다.
인생은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 생애를 걸고라도 탐구하면서 살아야 하는 무엇이다.
그것이 인생이다.......《모순, 양귀자》
소설《모순》은 주인공 진진이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위 문장은 첫 챕터의 마지막 문장이다. 이 문장을 마주한 순간 나는 한동안 멍해졌다. 둔탁하고 무거운 무엇으로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소설《모순》이야기를 하자면 대학 시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나는 그 시절 학구열에 불타는 학생까지는 아니었을지라도, 교수님들의 학문에 대한 애정과 연구만큼은 충분히 알아듣는 학생이었다. '저 정도는 되어야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구나. 문학을 사랑하고 연구한다는 건 그런 거구나.' 하며 말이다.
《모순》의 1판 발행일은 1998년도다. 내가 대학교에 입학한 해에 세상에 나온 책이다. 학과 교수님들은 이 책을 필독서로 권했고 실제 학과 커리큘럼에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분명 그때 이 소설을 읽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25년이 훌쩍 지난 지금, 독자들 사이에서 역주행 중인 이 소설의 표지를 맞닥뜨렸을 때 나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 때문이 아니었다. 개인적인 이유였다. 그 이유란, 책 내용이 좀처럼 아니 깡그리 기억나지 않았던 것이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실용서도 아니고 줄거리가 있는 소설이 기억나지 않다니. 더군다나 그 시절 나는 이 책을 꽤 좋아했었다. 내용은 잊었어도 좋아했던 그 감각은 여전히 선명한데.
이 웃지 못할 이유가 한동안 《모순》을 펼치지 못한 이유라면 그건 핑계일까. 설명하기 어려운 기분도 들었다. 나는 분했다. 이 묘한 감정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줄거리야 기억 안 날 수도 있다지만 그런데 분할 건 또 뭐람?
돌이켜보면 나는 '소설'이라는 장르를 공부하고 싶어서 전공 학과를 선택했다고 해도 무리 없었다. 박완서, 신경숙, 정이현, 성석제, 김영하, 이인화... 외국 작가보다는 국내 작가를 좋아했다. 하지만 삶은 소설 읽는 시간을 너그럽게 허락하지 않았다. 기업의 마케팅과 브랜딩, 콘텐츠 영역. 빠르게 변해서 조금만 놓쳐도 따라가기 어려운 분야. 내가 오래 일해온 영역이다. 늘 이것들이 우선이었다. 퇴근 후 집에 가도 관련 책들을 읽다 잠들지, 소설책은 펼치기 어려웠다. 그렇게 소설책에 먼지가 쌓여갔고 어느새 나는 서점에서 소설 코너를 지나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20여 년 시간을 돌고 돌아 마흔이 되었다. 삶에 틈이 조금 생겼달까. 내가 좋아하는 것, 이유 없이 끌리는 것에 시간과 마음을 쓰고 싶어졌다. 그 시작이 소설책을 사는 일이었다. 하지만 막막했다. 20여 년의 세월은 한 사람의 날카롭디 날카로웠던 소설 고르는 취향을 무디게 만들었다.
다행인 점도 있었다. 겨울서점님이나 편집자 k 채널 또 민음사 채널이 있어 참고할 수 있었다. 문학동네나 창비 뉴스레터도 때때로 반짝이는 소설가를 만나게 해주었다.
내가 어떤 소설을 좋아했는지 잊고 지냈던 시간을 지나 다시 소설책 앞에 앉았다. 내가 고르고 골라 산 책이 바로 이《모순》이다. 책을 펼치니 25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하게 여전히 팔닥 팔닥 살아있는 문장이 나를 맞이해 준다.
그리고, 난 한 문장에서 멈추고 말았다.
그랬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내가 내 삶에 대해 졸렬했다는 것, 나는 이제 인정한다. 지금부터라도 나는 내 생을 유심히 관찰하며 살아갈 것이다. 되어 가는 대로 놓아두지 않고 적절한 순간, 내 삶의 방향키를 과감하게 돌릴 것이다.
요즘 내가 천착하고 있는 문제여서일까. 하루하루 평안하기를 기도하면서도 막상 평안한 하루를 보내고 나면 '이렇게 평안해도 괜찮은 걸까' 반문한다. 아직 내가 처절하게 도전해야 할 어떤 과업이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가도, 하루하루 모를 심듯 성실하게 사는 것 또한 쉽지 않음을 느낀다. 이 생각들이 잘 관리한 어쿠스틱 기타줄처럼 매일 팽팽하다.
그런 나에게 책은 말을 건넨다.
"평안한 거? 좋지. 그러나 그것만 추구하면 안 돼. 그건 어쩌면 네 삶을 기만하는 것일지도 몰라. 지금보다 더 가슴 뛰는, 스스로를 북돋는 삶을 추구해. 흘러가는 대로 두지 말고. 모멘텀을 만나면 과감하게 방향키를 돌릴 줄도 알아야 해, 준비됐지?"
이 메세지를 자기 계발서가 아닌 소설에서 발견해서 더 좋았다. 이십 대, 방황하며 성장 중인 '진진'이라는 주인공의 말을 빌어 건네준 점이 좋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는 콧웃음을 치며 넘겼을지 모른다. 이를 위해 소설가는 어쩌면,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려고 그토록 애쓰는 사람들 아닐까.
앞으로도 나는 일터에서 돌아와 '오늘 하루도 잘 보냈다'며 안도하고 감사하는 날들을 보낼 것이다. 하지만 어떤 계기를 만난다면 삶의 방향키를 90도로 돌릴 수 있는 용기와 결단도 잊지 않으려고 한다.
잊은 줄 알았던 소설 내용이 사실은 내 삶의 여백 곳곳에 나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다시 펼쳐 든 책에서 비로소 깨닫는다. 그렇다. 나는 이 문장에 발목을 잡혔다. 이런 발목이라면 기꺼이 잡히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