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달이었던 8월,
15일이 가까워질 때쯤 나는 또 다시 병이 도지고 말았다.
8월 15일은 나의 할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기일이다.
돌아가신 지 1년이 흐른 것이다.
최근 잠도 잘 자고 집에 혼자 있는 것도 두렵지 않았었다.
허나 8월 15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의 뇌는 나를 작년 그 집으로, 그 공간으로 자꾸 데려갔다.
할아버지가 낮이고 밤이고 울부짖으며 괴로워하던 그 공간으로,
그를 보며 잠도 못 자며 괴로워하던 나와 부모님이 있던 그 공간으로.
흘기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던 할아버지,
화나는 마음을 꾹꾹 누른 채 그의 식단을 책임지며 요리하던 나.
안다. 1년이 지났을 뿐이고 8월 15일은 단지 8월 15일이라는 것을 분명 알고 있다.
근데 뇌는 자꾸 멍청하고 고장 난 태엽이 된 것처럼 2025년 8월 15일이 아닌, 2024년 8월 15일로 나를 데려갔다.
분명 나는 새로운 집에 있는데 자꾸 같은 일이 반복될 것만 같았다.
할아버지가 또다시 자살을 하고, 엄마 아빠가 그것을 발견하고, 내가 경찰을 부르고, 그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실에서는 정적이 흐르던 그날이 다시 진행되고 있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수십 번 종아리를 쓸어내렸다.
진정되지 않는 몸을 추스리기 위해 오른손, 왼손 번갈아 가며 가슴을 토닥였다.
숨을 쉴 수가 없어서 헉헉 거리며 애써 숨을 쉬려고 노력했다.
아무한테도 도움을 청할 수가 없었다.
끔찍했다.
누구라도 이 순간을 깨 줬으면 했다.
종아리를 수없이 쓸어내리다 장식품으로 둔 클림트의 마지막 초상화였던 '부채를 든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어? 팔 부분이 엄청 입체적이네? 이거 평면 종이였던 거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나는 숨 쉴 수 있었다.
0.1초 만에 그림 속 여인은 나를 현실로 끌고 와 주었다.
그때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살기 위해서는 지금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것을.
벌떡 일어나 수채화 팔레트, 붓을 챙겼고 물통에 물을 채워 의자에 앉았다.
작업 테이블 우측에 있는 책장에서 새하얀 종이가 붙어있는 패널을 하나 꺼냈다.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을 대충 닦아낸 후 남자친구에게 오늘 우리 집에 와서 놀다가 가라는 문자와 함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밤새 그림을 그릴 순 없으니, 남자친구가 올 때까지 그림은 잠깐의 대책일 뿐이었다.
잉크펜이 아닌 필기용 펜을 사용했다.
검은 형체는 복잡한 선과 함께 검은 기운을 뿜는다.
그것은 나의 할아버지이자 트라우마인 기억이다.
그 주변엔 다양한 색들로 번져진 행성 같은 것들이 있다.
그것은 내가 괴로운 시간들을 이겨낼 수 있었던 순간들이다.
글을 쓰는 순간, 그림을 그리는 순간, 좋은 사람들과의 시간.
패널의 옆면엔 Art Is With Me.라는 문구를 반복적으로 적고 흰색 수채화 물감을 이용해 띄처럼 둘렀다.
사진상엔 보이진 않지만 각도를 틀어서 보면 한 바퀴 뺑~ 둘러져 있다.
마치 주술을 걸어놓듯, 안전가드를 쳐두듯, 나는 미술 속에서 안전하다는 것을 상징하고 싶었다.
예전에 어떤 기사에서 이런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어떠한 사건 때문에 공황장애가 온 여자가 있었는데 길거리 한복판에서 패닉이 온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내 기억엔 폭동이나 전쟁으로 기억한다.)
이때 함께 있던 남자친구는 그 여자를 안정시키기 위해 키스를 했다.
이내 그녀는 안정을 찾았고 한 기자가 그 순간을 담은 사진으로 쓴 기사였다.
인간은 심각한 일을 경험한 후 트라우마가 생기는데 종종 의도치 않게 트리거가 작용되어 그 트라우마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때 다시 현실로 끌고 오는 장치를 "그라운딩(grounding) 기법"이라 부른다.
트라우나 회상 중 현재 시점으로 돌아오게 하는 방법들을 뜻하는데 사람마다 방식은 제각기라고 한다.
"나는 지금 안전하다."라고 말하는 것도 있고, 주변 사물을 만지는 것, 차가운 물 마시는 것 등의 감각을 자극하는 방법도 있다.
나의 경우엔 예술이다.
보던, 그리던, 만지던, 만들던.
예술을 다루면 나는 현실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이번 사건을 통해 알게 되었다.
내년이 되어도, 내후년이 되어도 할아버지가 나를 또 그날, 그 장소로 데려간다 하더라도 난 예술을 통해 몇 번이고 빠져나와 현실을 살아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