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근무를 시작할 때는 '약사님'이라고 불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언니, 이모, 애기 엄마, 새댁, 아줌마, 간호사, 누나...
비교적 어렸던 20대 새내기 약사 시절에는 내가 옷 가게 언니도 아니고 미용실 언니도 아닌데 '언니'라고 불리는 것이 좀 불편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그때가 좋은 시절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이가 드니 그렇게 부르는 경우도 거의 없다.
아기 엄마들은 주로 이모라고 많이 부르고 할머니들은 정말 다양한 호칭을 사용하신다. 새댁까지는 그나마 참겠는데 애기 엄마는 정말 충격적이었다. (아니 할머니..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애기 엄마는 너무 심하잖아요...) 간호사라고 부르는 할머니들도 생각보다 많다.
약국 근처에 공단이 있어서 손님 중에 외국인 근로자들도 많은 편인데, 한국말을 배울 때 누가 가르친 건지 몰라도 남자들은 다들 '누나'라고 부른다. 나이가 있는 여자에게는 이모보다 누나라고 불러주면 좋아한다고 배운 걸까? 혼자 생각해본다.
사실 내가 기대했던 약사님 호칭은 거의 듣기 힘들다. 그래도 저런 호칭들은 그나마 친근하게라도 느껴져서 괜찮지만 약장수, 약쟁이 등 직업을 비하하는 뜻이 담긴 호칭은 정말 듣기 싫고 불편하다.
'약장수는 다 좋다 하겠지' '약쟁이 하는 말이 다 그렇지' '약장사가 약 팔아먹으려고 하는 말이겠지'
이런 말을 들으면 정말 힘이 빠지면서 회의감이 느껴질 때도 있다.
예전에 배웠던 백정과 박서방 일화가 생각난다.
정육점을 운영하는 나이 지긋한 박 씨 성의 백정이 있었는데 어느 날 젊은 양반 두 사람이 고기를 사러 왔다.
먼저 한 양반이 "어이 백정, 고기 한 근 잘라줘"라고 주문을 했고, 다른 양반은 "여보게 박서방, 고기 한 근 주시게"라고 말했다.
그런데 고기 양이 달랐다. 두 번째 주문한 양반의 고기가 훨씬 많았던 것이다. 먼저 고기를 주문한 양반이 "똑같이 고기 한 근을 샀는데 왜 양이 다르냐?"라고항의를 하자 고깃집 주인이 대답했다."그것은 백정이 잘라준 것이고, 이것은 박서방이 드린 것입니다"
상대를 존중하는 말하기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짧지만 묵직한 글이다.
나 역시 '약장수'같은 호칭으로 부르는 사람에게는 친절하게 대하거나 자세히 설명해주고 싶지 않다. 어차피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설명을 해도 제대로 듣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저 직업인으로서 꼭 필요한 응대만 할 뿐이다. 반면 '약사님'이라고 부르며 존중하는 태도로 질문을 하는 사람에게는 시간이 조금 걸려도 자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주려고 노력한다. 약국에서 친절한 설명을 듣고 대접받고 싶다면 호칭부터 바로 하는 게 어떨까? 직업적 자존감이 올라가는 순간 약사는 더 친절해지기 마련이다.
비단 약국에서의 문제만은 아니다. 일상 속에서도 타인의 태도를 탓하기에 앞서 자신의 언행부터 체크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예의를 갖추어야 나도 대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우리는 어릴 때부터 듣고 배워서 화법의 중요성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을 의식적으로 떠올리며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머리로 아는 것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 바탕에는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이 있어야 되는데,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그런 마음 자체가 없다고 느껴지는 사람도 많다.
나는 첫 번째 양반과 두 번째 양반 중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한 번쯤 생각해보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을 한 적은 없는지 반성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