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녀가 태어나던 날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병원으로 달려가면서 느꼈던 그 설렘은 내 인생에서 처음이지 싶었다. 어떻게 서울의 병원에 도착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달렸다. 휴게소고 뭐고 들릴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빨리 달려가서 만나 보아야겠다는 맘이 너무 커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운전을 하는 남편 역시 그래 보였다. 운전을 능숙하게 하는 사람인데도 흔들림이 몇 번 감지되기도 했다. 병원에 도착하여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못하고 계단으로 뛰어 올라가 대기실에 섰을 때는 다리가 후 들려서 털석 주저 않고 말았지만, 아이를 언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물었다.
손녀를 처음 봤을 때 그 감동 역시 내 인생에 이런 감동이 또 있을까 싶었다. 그렇게 태어난 손녀딸은 태어나자마자 나에게로 와서 1년을 컸다. 집안은 온통 손녀 위주로 돌아갔다.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손녀 육아를 한다고 하자 주위에서 모두 말렸다. 한마디로 " 왜 봐줘!!"였다. 만나는 사람들 모두 가 똑같은 말을 했다. 그리고 한결같이 곁들인 말이 있다. " 그럼 너 인생은 뭐냐고?"
딸은 출퇴근을 2시간이나 걸려서 했고, 힘든 병원일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 육아 고민을 할 때 아무 고민도 없이 " 내가 봐줄게" 했다. " 엄마도 직장 다니면서 어떻게?" 낮에는 육아도우미를 쓰고 내가 보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손녀 육아를 시작했다.
손녀 육아를 시작하려고 했던 가장 큰 이유는 딸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태어나자마자 아빠의 군입대로 깊은 산골에서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모유가 부족해서 늘 배고파했고, 아빠가 제대를 했다고 해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도 딸은 올바르게 잘 컸고, 10년 만에 동생이 태어나자 직장 생활하는 나를 대신하여 방과 후 동생을 보살피면서도 공부를 잘하여 졸업할 때는 장학금까지 받았다.
그 후 대학을 가고, 결혼을 하고, 뭐든 제 혼자 다 했다. 그런 딸에게 항상 미안한 감은 들었고, 혼자서 애태우고 사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짠했다.
그래서 딸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앞뒤 생각 없이 손녀를 키워 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손녀는 1년간을 우리 집에 있었다.
퇴근을 하면 아이를 데리고 일단 밖으로 나갔다. 데리고 나가 마트 가서 집에서 보지 못한 다양한 상품들을 보여 주며 설명을 해주었고, 바다로 데리고 나가 바다를 이야기해 주었다.
꽃이 피면, 꽃을 보여주고, 단풍이 들면 단풍을 보여주고, 축제장으로도 달려갔고, 시장의 시끌벅쩍한 모습도 보여 주었다.
나와 남편은 손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모든 해 주고 싶었다. 아이와 자전거를 타고, 버스를 태우고, 드라이브도 즐기고... 그 모든 것이 나에겐 행복이었고 사는 보람이었다.
주말마다 아이들이 왔다 갔다. 제부모가 다녀간 후 울기라도 하면 안쓰러워 또 들쳐 없고 바다로 가고, 공원으로 나갔다.
어떤 날은 딸 내외가 탄 버스에서 아이가 제 부모를 볼 수 있도록 시간에 맞추어 길거리에 나가갔다 자빠지기도 하였다.
퇴근해서 아이의 용품을 세탁하고, 청소를 하고, 다음날 아이가 사용할 용품을 준비하면 10시가 넘었다. 그래도 힘들지 않았다.
나는 힘들지도 않았고, 오히려 행복하고 행복했다. 하지만 아이를 데리고 나갔을 때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 왜 힘들게 아이를 봐주냐" 고 했다. 참 듣기 싫었다.
"하나도 안 힘들어요. 딸이 힘든 게 저 한테는 더 힘들어요. 그리고 얼마나 이쁜데요" 하며 답변을 하곤 했다.
사실이 그랬다. 내가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 되고, 자기 계발을 해서 만족을 한다고 해도, 내 자식이 불행하고 힘들다면 난 결코 즐겁지 않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나의 존재가 무엇인가. 내 인생을 살아서 가족이 불행해지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물론 내가 나이 들어 아프고 힘들 때 자식들이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겠지.. 하지만 그런 생각은 없었다.
지금의 내가 행복하면 된다. 지금 내가 행복하고 자식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걸로 좋은 거지.. 그게 내 인생이고 내 삶이지..
손녀가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 함미!! 함미!!" 라며 입을 오물거릴 때 그 행복과 감동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난 " 함미 맘의 육아"를 잘해 내었다.아이가 커서 이제 10살이 되었고, 나는 퇴직을 앞두고 있다. 퇴직하면 뭐해? 하고 주위에서 묻는다.
그럼 난 한결같이 대답한다 " 아이들 좀 봐주고, 우리 손녀랑 여행 다닐 건데.. 국내도 가고 세계도 가고" " 아니 그만큼 봐줬으면 되지 아직도 못 벗어났어?" 한다.
지금 세상은 아이를 혼자 키우기가 쉽지 않다. 방과 후에 보살펴 주는 제도가 있어도 어린이집에서는 일찍 데려가는 아이를 선호한다. 아플 때라든지 갑자기 아이가 어린이집에 갈 수 없을 때, 당장 어디에 맡길 수도 없다.
그리고 학부모 면담에도 가야지, 학교 행사에도 가야 하고, 직장인들은 시간 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제도가 있다고 해도 이용하기가 쉽지는 않다.
아이 낳기 좋은 세상이 아니라 아이 기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보니, 키우는 아이들도 힘들고, 커가는 아이들도 힘들다.
그래서 난 퇴직후에라도 아이들이 내가 필요하다면 또 달려 갈것이다.
그리고 아이 키우기 힘든 요즘, 아이 봐준다고 하면 말리지 말자. 대신에 본인의 행복의 우선순위와 건강을 고려해서 판단을 내려 육아에 참여하자.
그리고 손자 육아를 하는 사람들에게 " 왜 봐주느냐?" 며 뭐라하지 말고, 격려를 해주었으면 좋겠다.
이젠 퇴직도 하게되고, 아이들도 커서 손이 많이 가지 않는다. 그래도 딸이 부르면 달려 갈 준비가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