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제품과 함께 흘러가는 시간

검은 고양이의 귀울림 소리처럼

by 알이




김연수 님의 청춘의 문장 중 좋은 문장을 옮기고, 읽고 떠오른 생각들을 기록합니다.


간절히. 손꼽아. 그리고 세월은 흘러갔다. 책을 사고 싶으니 돈을 달라고 말하면 늘 돈과 함께 나오던 어머니의 한숨마냥 느릿느릿. 읽은 책을 또 읽고 또 읽고 또 읽어서 결국에는 다 외워버릴 정도가 될 정도로 느릿느릿. ~ 재촉하는 만큼 빨리 흐르지는 않는다고 해도 나이가 들고 싶다는 아이의 소원쯤이야 들어준다는 것, 삶이 너그러운 건 그때뿐이다.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렇게 흘러가던 세월의 속도다. 그 시절이 결코 아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던가 아빠가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를 사줬다. 그 유명했던 마이마이였다. 그런 물건이 있는지도 몰랐다가 처음 받은 마이마이에 나는 너무도 행복했다. 음악을 나 혼자 들을 수 있다니! 그때부터 학교에도 들고 다니고 집에서도 늘 마이마이를 끼고 있었다. 아마도 아빠는 그걸로 영어 공부를 하길 바랐겠지만 나는 용돈을 모아서 산 대중가요 테이프를 들었다. 그 마이마이는 내 추측에 그 당시에 나온 제품 중에 꽤 좋은 것이었던 듯하다. 오토리버스 기능에 녹음 기능까지 다양한 기능이 많았다. 그렇지만 전자제품 시장은 냉혹해서 금방 좋은 제품들이 쏟아졌다. 고작 3년 정도 지났을 때 내 마이마이는 이제 구닥다리가 되었고 거기다 물건을 곱게 쓰지 못하는 주인 때문에 뚜껑이 제대로 안 닫히는 처지까지 되었다.


그때 아빠가 사 온 휴대용 플레이어는 무려 이어폰에 큼지막한 리모컨이 달려 있고 내장 배터리가 다 떨어지면 일회용 건전지를 사서 쓸 수 있는 기능도 있었다. 리모컨에 기뻐한 것도 잠시 중학교 들어갈 즈음에 휴대용 CD 플레이어가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염치를 모르는 중학생은 이번에는 CD플레이어를 사달라고 졸랐다. 아빠의 의도대로 사용하지 않아서인지 이어폰을 너무 오래 끼고 있다고 걱정하는 엄마 때문인지 신제품이 너무 빨리 나오기 때문인지 아빠는 이번에는 쉽게 사주지 않았다. 나는 음반가게에 가서 진열된 CD들을 보며 가게 주인아저씨에게 물었다. “CD가 더 좋은 거예요? 왜 더 비싸요?” “이건 아무리 들어도 테이프처럼 늘어지지 않거든. 사진도 더 많이 들어있고.” 사도 들을 수가 없는데 비싸기까지 하니 테이프를 살 수밖에 없었다. 견본으로 진열된 CD를 괜히 만지작거리다 집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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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밤늦게 들어온 아빠는 갑자기 CD플레이어를 사 왔다며 조그만 박스를 내밀었다. 나는 함성을 발사하며 박스를 뜯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로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빠한테 사달라고 조르며 상상한 CD플레이어는 두께도 얇고 멋진 리모컨이 달린 것이었는데 박스 안에 있는 것은 투박하게 생긴데도 리모컨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받았으니 감사의 인사를 해야 했지만 실망한 표정은 쉽게 걷어내지 못했다. 지금 돌아보면 아빠가 꽤 서운했겠다 또는 괘씸하게 여겼겠다 싶지만 중2병 직전의 청소년은 그런 걸 헤아릴 정신머리가 없었다. 방안에 들고 들어와서 왜 최신형 CD플레이어를 안 사주냐고! 분노하면서 집에 있는 CD를 끼워 넣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스스스 돌아가는 소리에 마음이 좀 누그러지긴 했지만 나중에 돈 벌면 최신형 기기를 실컷 사야지 얼리어답터가 되겠다고 그 단어도 모른 채로 다짐했다.


20190719_104156.jpg 김중혁作 모든 게 노래 중에서


그리고 얼마 뒤 결국 원하던 CD플레이어를 얻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MP3가 나왔다. 몇 개의 MP3를 바꾸는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내가 돈을 벌어 전자기기를 사는 날이 왔다. 막상 내 돈으로 사려고 하니 그 새로 추가되었다는 기능들을 퍽 신뢰할 수가 없었다. 잘 작동하려나 그 기능을 내가 잘 쓰려나 그리고 언제나 최신형은 너무 비쌌다. 결국 그 수많은 생각들을 떨치지 못해 나는 얼리어답터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오래 쓰려했지만 물건을 오래 쓰지 못하는 자신에게 분노하고 중저가의 필수 기능만 들어 있는 기기만 골라 쓰고 있다.


어른이 되고 싶었던 적은 없지만 돈을 벌어서 내가 사고 싶은 것을 사면 더 기쁠 거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내 마음대로 돈을 쓸 수 있으면 좋을 거라고만 생각했지 돈을 벌어야 하는 고단함은 전혀 짐작할 수 없던 시절. 그토록 느릿느릿 빨리 가지 않던 시간은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 빠르게 흘러 내가 바라던 날에 도착했다. 더 좋은 기기들이 많고 내가 원하면 살 수 있는 날들이지만 처음 그 휴대용 플레이어를 받던 날만큼 설레고 기쁜 순간은 없다. 나 역시 그렇다고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고 그때 그 처음의 감정과 세월의 흐름이 그립다. 어서어서 시간이 흐르기를 바라던 날들과 너무도 강렬한 기쁨이었던 처음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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