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층까지 뛰어 올라가기

어둠을 지나지 않으면 어둠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by 알이




김연수 님의 청춘의 문장 중 좋은 문장을 옮기고, 읽고 떠오른 생각들을 기록합니다.



그즈음부터 나는 밤늦게 아무도 없는 산길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돌아서서 불빛 속으로 뛰어가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고 어둠 속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었다. 걸으면서 나는 어둠을 하나하나 들여다봤다. ~ 어둠을 이겨내지 못하면 그 아이를 이겨낼 수 없을 것이라는 절박감이 나를 그렇게 내몰았다.


그 어둠을 보지 못했더라면 나는 아주 하찮은 조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어둠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면 그 어둠에서 벗어 날 수 없다는 것, 제 몸으로 어둠을 지나오지 않으면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어둡고 어두울 정도로 가장 깊은 어둠을 겪지 않으면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그건 중학교 2학년생에게는 너무 가혹한 수업이었지만, 또 내 평생 잊히지 않는 수업이기도 했다.



두 가지 장면이 떠오른다.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나와 여러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온갖 욕을 듣고 있는 나.


CIMG7377.JPG 피렌체 두오모 올라가는 길.


1) 고등학생 때까지 살던 본가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짜리 아파트였다. 우리 집은 5층이었기 때문에 꽤 많은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 했다. 계단이 많아서 힘들다기보다는 어둠이 문제였다. 어린 시절 내 큰 걱정 중 하나는 해가 지고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것이었다. 나는 엄청난 집순이였기 때문에 해가 지고 집에 들어 올 일이 거의 없었지만 딱 일주일에 한 번 피아노 수업을 듣고 돌아오는 길이 문제였다. 깊은 밤도 아니고 저녁 먹을 때쯤 끝나는 것이었는데도 겨울에는 해가 빨리 지니 무서웠다. 던전 입구에 선 용사마냥 비장하게 위를 올려다보며 불 켜진 층이 몇 개나 되나 세었다. 불 켜진 층이 절반도 안 되면 숨을 크게 들이쉬고 한 번에 달려 올라가고 불이 다 켜져 있으면 여유롭게 걸어 올라갔다. 그러다 보니 발을 잘 못 디뎌서 넘어져서 다리에 상처가 없는 날이 몇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실체 없는 두려움이었다. 불을 켜면서 천천히 올라가는 게 덜 무서웠을 것 같기도 하고 집집마다 누가 사는지 다 알고 있어 도움을 청해야 한다면 어느 집이라도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는데 꽤 오래도록 그렇게 숨을 참고 뛰어올라 다녔다. 어린 나를 만날 수 있다면 같이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면서 어떤 게 무서운지 묻고 싶다. 그러니까 무섭다고 누군가에게 말했다면 엄마가 데리러 내려왔을지도 모르고 어떤 점이 무서운지 같이 얘기했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그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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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학교 2학년 때 체육시간이 끝나고 콜라 자판기 앞에 줄을 서 있었다. 보통 흔히 말하는 잘 나가는 애가 새치기를 하려 했다. 덥고 목말라서 눈에 뵈는 게 없었는지 나는 그 애에게 새치기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 애는 혼자 있어서였는지 별 다른 말없이 뒤로 가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 날 하루를 보냈다. 수업이 다 끝나고 다른 반 친구와 같이 가려고 친구 반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아까 새치기하려 했던 애가 자기 친구들을 데리고 다가왔다. 나도 말싸움이라면 지지 않을 자신이 있어서 그 애들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건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애초에 그 애들은 말싸움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욕을 퍼부으려고 온 것이었으니까. 그러니 대꾸를 할 말이 없었다. 나는 그저 고개를 옆으로 돌려 벽에 걸린 시계만 바라보고 있었다. 애미애비가 어쩌고 온갖 신기한 욕들이 쏟아졌다. 그 욕을 듣는 와중에도 이런 욕은 또 처음 들어보네. 속으로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시계를 보고 있으니 정확히 시간이 얼마나 흐르는지 알 수 있었다. 20분쯤 지났을 때 누군가가 와서 그 애들에게 그만하고 가자고 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초등학교 때는 잘 지냈지만 중학교 와서는 자연스럽게 멀어진 친구였다. 그 애들은 내 앞에 침을 뱉고 그 친구를 따라갔다. 무표정으로 서 있던 나는 갑자기 얼굴에 피가 쏠리는 걸 느꼈다. 그제야 다른 애들의 흘끗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화장실로 천천히 걸어갔다. 문을 걸어 잠그고 엉엉 울었다. 내 친구들이 사정을 듣고 화장실로 달려와서 문을 두드렸다. 그때는 시계를 볼 수 없었으니까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다. 문을 열고 나가니 친구들은 울상이 되어 화장실 문 앞에 서있었다. 갑자기 그 모습을 보니 웃음이 터졌다. 나는 친구들을 끌어안고 웃었다. 애들은 이게 욕을 많이 쳐 먹어서 미쳤냐고 했다. 나는 욕먹고 우는 애한테 또 욕을 하냐고 했다. 그래 놓고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엄마를 보고 또 울었다. 거실에 앉아 엄마가 내 머리를 다듬어 주는 동안 거실 티비장 앞으로 들어오던 햇살을 바라보며 그 일을 말했다. 엄마의 조근조근 대답하는 목소리와 사각사각 들리는 가위질 소리에 머릿속을 맴돌던 그 욕지거리들이 조금씩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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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가에서 나와 살면서 자주 꾸던 악몽 중에 아파트 계단을 오르는 꿈이 많았다. 깨어서 꿈을 되짚어 보면 딱히 무서운 장면은 없는데도 꿈속의 나는 벌벌 떨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 인생에서 제일 무서웠던 것은 집 계단 오르기였나 보다. 한 번쯤은 어둠을 바라보고 천천히 걸으며 무서울 것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면 인생을 조금 덜 괴롭게 살 수 있었을까. 그걸 하기엔 나는 너무 어렸겠지. 하지만 나를 오래도록 괴롭게 했던 것들은 대부분 어두운 계단 오르기의 변주에 지나지 않았던 듯하다. 어둠처럼 실체 없는 내 상념이 부푼 것들. 새치기한 애에게 줄 서라고 했다고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욕을 다 들었지만 그게 두고두고 나를 괴롭게 하진 않았다. 화장실에 가서 펑펑 울고 친구들의 위로를 듣고 엄마에게 말하면 조금씩 벗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누가 들어도 힘들다 할 것 같은 일들은 나도 내가 힘든 것을 이해하기 쉬웠다. 하지만 그런 실체 없는 공포감은 누군가에게 말하기만 해도 가벼워질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우선 내가 이해할 수 없으니 다른 사람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한동안 궁금했다. 그런 사소한 두려움을 왜 말할 수 없고 무서워만 하는 건지. 늘 나를 바랐다. 예민하지 않고 모든 일에 두려워하지 않으며 감정 기복 없이 한결같은 사람이 되도록. 수많은 변주 앞에서 나는 나를 계속 다그쳤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변할 뿐 사람의 성정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됐다. 무섭고 두려운 것에는 이유가 없는 것. 나는 사실 무서운 게 많고 예민하고 미래를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조금씩 용감해지고 따뜻해지고 현실을 꽉 채우려고 노력하는 그런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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