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이어주는 말들

서리 내린 연잎은 그 푸르렀던 빛을 따라 주름져 가더라도

by 알이




김연수 님의 청춘의 문장 중 좋은 문장을 옮기고, 읽고 떠오른 생각들을 기록합니다.



그의 격려 덕분에 내 안에 가시덩굴처럼 쌓여 있던 수많은 두려움들, 예컨대 “이제까지 백일장은커녕” 같은 것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쓸쓸한 물고기 같았던 내게도 거문고 소리가 들려온 것은 내 안에 있는 재능을 더 열심히 살려보라고 권유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서리 내린 연잎은 그 푸르렀던 빛을 따라 주름져갈 테다. 연잎이 주름지고 또 시든다고 하더라도 한때 그 푸르렀던 말들이 잊히지는 않을 것이다. 내게도 그처럼 푸르렀던 말이 있었다. 예컨대 “글을 잘 읽었다”라든가, “그거 좋은 생각이구나. 네가 어떤 시를 쓸지 꼭 보고 싶다” 같은 말들. 그런 말들이 있어 삶은 계속되는 듯하다.



그 해 여름에는 비가 많이 왔다. 그래서 별로 덥지는 않았지만 곰팡이가 아무렇게나 피었다. 그때 나는 예체능 학원들을 전전하는 초딩처럼 목요일은 그림 학원 화요일은 글쓰기 수업을 듣고 있었다. 돈 벌면 하고 싶은 걸 하는 거였지만 마음은 신나기는커녕 어딘가 쫓기는 사람 같았다. 어릴 때 다니던 학원들은 중고등학생이 되면서 공부해야 한다는 명목 하에 하나씩 그만두게 되었다. 아쉬웠지만 계속할 재능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래도 아쉬움은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남아있었다. 언젠가는 제대로 배워서 좋아하고 싶었고 꾸준히 하고 싶었다. 그런 희망찬 마음으로 수업을 신청했지만 일주일에 한 번 수업 듣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림을 배우면 그리는 게 너무 재밌어서 재료를 사고 집에서도 그리고 매일매일 그리게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3개월이 지나도 여전히 수업만 겨우 참석하고 있었고 너무 피곤해서 그림이 싫어질 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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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선생님은 나와 같은 고향 출신의 아저씨였다. 그래서 고향 이야기는 가끔 했지만 지금 여기에서의 삶은 거의 이야기 한 적 없었다. 그때의 내 일상을 누구에게 이야기하고 싶지가 않았다. 특히 그 주는 너무 거지 같았다. 비가 3일 내내 오고 있었고 그 앞 주 애인과 헤어졌고 회사를 그만두고 싶은데 그만 둘만큼 좋아하는 것을 찾지 못해 답답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만이라도 이 복잡한 생각들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며 학원으로 갔다. 하얗고 부드럽고 뽀송한 종이를 합판에 고정시키고 코끼리를 그리려고 했다. 라디오에서는 나와 비슷한 고민이나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사연이 쏟아지고 있었다. 내 기대만큼 나는 그림에 집중하지 못했다.


선생님은 오후에 꼬맹이들이 큰 나무판에 그린 그림이라며 말들이 풀밭을 뛰어다니는 그림을 보여줬다. 꼭 김점선 그림에 나오는 말들 같았다. 말들은 웃고 있었다. 와- 멋지네요. 로봇 같이 말하고 내 그림으로 다시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도 옆에서 코끼리를 그리고 있었다. 자꾸만 풀밭에서 웃고 있는 말들에게 눈길이 갔다. 아이들이 깔깔 웃으면서 색칠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데 나는 울고 있었다. 너무 쪽팔려서 종이에 고개를 처박았지만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그 주에 나는 회사에서 화장실을 가다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밥 먹다가 질질 짜고 있었다. 그래도 혼자 있을 때만 울어서 쪽팔린 적은 없었는데......


말 싸리잎.jpg 김점선 作 말, 파란싸리잎

선생님은 꽤 오래 모른 척하다가 내 코끼리 엉덩이 부근으로 휴지를 밀어줬다. 나는 코를 풀면서 코끼리 그리기 어려워요. 그리기 싫어요. 애처럼 징징댔다. 정작 애들은 환하게 웃고 있는 멋진 말 잘도 그리는데 나는 코끼리도 못 그리는 어른이었다. 선생님은 다른 종이를 가져왔다. 거기에 큰 고양이를 그렸다. 그리고 새카맣게 색칠했다. 까맣고 큰 고양이. 그리고 배경에는 아무 색깔이나 마구 칠하며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미대 졸업하고 그림책 삽화 일 했던 것. 출판사에서 일했던 것, 연극했던 것. 대부분 3년 이상 해 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림 가르치는 일은 유일하게 3년 이상 하고 있는 일이지만 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 그만 둘 생각이라고 했다. 코끼리 그림도 애쓰지 말고 마음대로 그리면 된다고 했다.


그저 짐작으로 한 말이었지만 내 상황에 충분했다. 그리고는 칠판에 붙어 있는 지난주 그린 내 그림을 가리켰다. 색을 잘 써서 다른 사람들 참고하라고 붙여 뒀다고 했다. 학원 다니기 시작할 때 나도 언젠가 잘 그려서 칠판에 붙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붙어 있어도 보지 못할 만큼 내 시야는 좁아져 있었던 것이다. 그 안에서 나는 오직 머저리였고 한심한 인간이었다. 선생님의 말 한마디로 색을 잘 쓰는 사람이 되었고 내가 나를 이유도 없이 몰아붙이는 중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다음 주 글쓰기 선생님은 글을 많이 쓴다고 했다. 그것도 재능이라고 했다. 그 말에 나는 재능 있는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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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 주 나는 근근이 코끼리를 완성했다. 그리고 그 해가 끝나기 전 비행기표를 5개월 할부로 사는 바람에 글쓰기 수업도 끝나고 그림 학원도 그만뒀다. 그렇지만 누가 뭐라던 나는 색을 잘 쓰는 사람이고 또 재능 있는 사람이었다. 그 말들 덕분에 그림과 글에서 너무 멀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다음 해 봄쯤에 내 속에 살던 곰팡이들이 말라죽고 비행기표값 할부도 끝나서 그림도구들을 주문했고 혼자서 제멋대로 그리고 색칠했다. 학원을 다닐 때 그토록 초조할 정도로 바라던 별 것도 아닌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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