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그림 찾기

그 그림자, 언제나 못에 드리워져

by 알이





김연수 님의 청춘의 문장 중 좋은 문장을 옮기고, 읽고 떠오른 생각들을 기록합니다.


어린 시절에 나는 어머니가 김천에서 두 번째로 예쁜 처녀였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첫 번째라고 말하지 않았으니까 이렇게 공개적으로 쓰더라도 어머니 또래의 김천 할머니에게서 항의가 들어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나는 늦되게 태어나서, 또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아서 어린 시절에는 세상 물정을 잘 몰랐던 모양이다. 그런데 내가 세상 물정을 알든 모르든 시간은 참으로 부지런히 흐르더라.


삶아서 먹으면 능히 병 없이 오래 살 수 있다고 하는 가사어도 기실 소나무 그늘이 없었다면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 우리 어머니, 요코하마보다도 더 먼 곳에서 오셔서 내 몸에 언제나 그림자를 드리워주셨으니 내가 지금의 이름으로 불려질 수 있는 까닭은 모두 그 때문이다.



작년 가을쯤이었나. 본가에 내려가서 할 일 없이 누워서 티비 채널을 돌리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문득 눈을 떠보니 티비는 꺼져 있고 햇빛은 마루 깊숙이 들어와 있고 집은 온통 고요했다. 일어나서 안방으로 가보니 엄마가 엎드려서 뭔가를 쓰고 있었다. 그 웅크린 모습이 뭔가 귀여워서 뭐해! 하며 놀래켰다.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는 엄마 옆에 놓인 수첩을 보니 일기 같았다. 기웃거리며 좀 보여 달라고 하니 수첩을 절대 사수하며 갑자기 괴력을 발휘해서 나를 방 밖으로 밀어냈다. 언젠가부터 엄마가 귀여울 때가 종종 있다. 떨어져 산 시간이 길어질수록 엄마를 같이 살 때와는 다른 눈으로 보게 된다.


DSC03241.JPG


어릴 때 외모나 성격 면에서 아빠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그게 괜히 싫었다. 엄마 닮았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주변 사람들이 말하길 엄마는 고향에서 결혼하자는 사람이 너무 많아 셀 수가 없었다고 할 만큼 예뻤다고 했다. 좀 어이없지만 엄마도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내가 봐도 엄마랑 나는 외모 면에서 닮은 구석이 전혀 없어 보였다. 걸음걸이도 아빠의 팔자걸음이랑 똑같다며 엄마가 뒤에서 보다가 웃곤 했다. 하다못해 엄마의 굵고 검은 머리카락과 달리 내 머리칼은 얇고 색도 옅었고 엄마는 늘 침착하고 꼼꼼했는데 나는 맨날 덜렁대고 넘어지고 감정이 요동치는 것 같았다. 그래서였는지 엄마는 나를 이해 못 해 줄 것 같아 뭔가 비밀 이야기 또는 고민이 생기면 아빠에게 쪽지를 써서 아빠에게만 이야기하곤 했다. 그 당시에는 아무 말 없던 엄마는 요새 가끔 그때 네가 그랬노라고 섭섭했다고 말한다.


대부분 청소년들이 그러겠지만 사춘기 시절 엄마는 나와 너무 달라서 나를 이해해 줄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완고해졌다. 괜히 대화도 하기 싫고 엄마가 하는 모든 일들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있었다. 엄마는 늘 집안을 쓸고 닦고 정리 중이었다. 딱히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뭘 그렇게 깨끗이 하냐고 귀찮게 하냐고 짜증을 냈다.


20190924_234631.jpg


중학생 시절 내가 아토피 증상이 있었던 때였다. 너무 간지럽지만 평소에는 그런대로 참다가 잠결에 심하게 긁어서 상처가 악화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당연히 손톱을 짧게 깎아야 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나 자신이 이해가 안 되지만 손톱을 짧게 깎는 것이 너무 싫었다. 엄마랑 나는 몇 분 째 쓰레기통과 손톱깎이를 사이에 두고 실랑이 중이었다. 손톱을 더 깎아라 싫다 말이 오고가다 속이 터진 엄마가 내 손을 억지로 잡고 손톱을 깎으려고 했다. 나는 손을 억지로 뺐고 쓰레기통이 엎어졌다. 쓰레기통을 바라보는 엄마의 얼굴은 붉어졌고 눈에 눈물이 살짝 고였다. 엄마는 목이 멘 듯 한 목소리로 마음대로 하라며 자리를 떠났다. 그제야 갑자기 마법에서 풀리기라도 한 듯 내가 이상한 고집을 부렸다는 걸 깨달은 나는 쓰레기통을 정리하고 손톱을 깎았다.


더 크게 혼난 적도 많지만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은 순간이다. 혼자 살면서 그토록 짜증내고 귀찮아하던 엄마가 하던 일들을 나도 모르게 그대로 하는 나를 보면서, 꽃가루 날리는 봄 콧물 훌쩍이며 열에 들떠 이불을 싸매고 덜덜 떨면서 자꾸 떠올리게 된다. 아토피에 온갖 알러지가 있는 나 때문에 청소를 그렇게 한다는 걸 그때는 왜 헤아릴 수 없었을까.


20181008_135521.jpg


몇 해 전 그림 학원을 다닐 때였다. 친구에게 학원에서 그린 그림을 보여주며 그림 그리는 취미도 재미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친구가 문득 나에게 엄마랑 닮았다고 말했다. 갑자기 무슨 소리냐고 의아해하니 엄마가 취미로 서예 하는 것을 이야기했다. 그렇게는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기분이 몽글해졌다. 몰래 쓰는 일기마저도 똑같으니까. 엄마가 사랑하는 것들을 나도 사랑하고 있다니. 엄마의 그림자는 내가 모르는 사이 내 삶 곳곳에 자리 잡았나 보다.


요새는 가끔 엄마와 둘이 있으면 사람들에게 엄마와 닮았다는 말을 듣는다. 엄마는 그럴 때마다 꼬박꼬박 아빠랑 더 닮았다고 말하며 딱히 동의하지 않는 것 같지만 나는 그냥 기분이 좋다. 사랑하면 닮는다니까.



이전 27화마음의 겨울방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