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겨울방학

외롭고 높고 쓸쓸한

by 알이





김연수 님의 청춘의 문장 중 좋은 문장을 옮기고, 읽고 떠오른 생각들을 기록합니다.


함박눈이 내리다가 어느 틈엔가 비로 바뀌는 풍경을 바라보자면 마음이 참으로 예민해야만 한다. 언제 눈이 비로 바뀌었는가를 알자면 눈뿐만 아니라 귀도 열어놓아야만 한다. ~처마 밑으로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다가 그 소리가 점점 커지면 바로 그 순간 눈은 비로 바뀐다. 눈이 비로 바뀌는 그 짧은 순간에 아이들은 조금씩 자라나는 것이다.


반쯤 잠들고 반쯤 깨어 있는 그런 상태. 아직 한 학년은 끝나지 않았고 새로운 학년은 시작되지 않은 그런 상태. 더없이 외롭고 높고 쓸쓸한 상태.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겨울방학이란 아무것도 충전할 수 없는, 그저 반쯤은 피로하고 반쯤은 쓸쓸한 시기다.


가장 낮은 곳에 이르렀을 때, 산봉우리는 가장 높게 보이는 법이다. 그리고 삼나무 높은 우듬지까지 올라가본 까마귀, 다시는 뜰로 내려앉지 않는 법이다. 지금이 겨울이라면, 당신의 마음마저도 겨울이라면 그 겨울을 온전히 누리기를. 이제는 높이 올라갈 수 있을 테니까.



대학 8학기. 대부분 졸업을 앞둔 마지막 학기라고 생각하는 그때 나 역시도 그렇게 생각하며 학교 전산 프로그램을 보며 내 졸업요건을 확인하고 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아무리 학점을 계산해 봐도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물론 학점이 거지 같다는 것에도 꽤 문제가 있었지만 더 큰 문제는 그런 학점으로도 졸업 자체를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아무리 이렇게 계산을 하고 저렇게 과목을 갖다 붙여도 전공교양 3학점이 부족했다. 분명히 수강 신청할 때 신청해야 하는 과목을 적어둔 수첩에는 전공교양 과목이 있었는데 이미 개강한 지 1달이나 지난 시점 내 시간표에는 전공과는 아무 관련 없는 내가 듣고 싶은 과목만 가득했다.


졸업하기 싫어 미치겠다는 무의식이 나도 모르게 일을 저지른 걸까. 황당한 표정으로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다가 이런 멍청한 학생이 나 말고도 분명 있으리라 구제책이 있을 거라는 기대로 과사무실로 찾아갔다. 과연 나 같은 멍청한 학생은 없었다. 나는 혼란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혹시 지금 수업을 신청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느냐고 물었지만 조교는 멍청한 학생을 바라보는 표정으로 정정기간은 다 지나서 방법이 없다고 했다. 그 수업은 전공별 커리큘럼에 들어 있어서 계절학기나 1학기에는 없었다. 꼼짝없이 한 학기를 휴학하고 9학기 째를 다녀야 할 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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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학교를 나와서 자취방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뭐하냐는 물음에 왠지 헛웃음이 났다. 대체 나는 뭘 하고 있는 거지. 뭔가 큰일이 난 것 같았는데 바람은 시원하고 햇살은 너무 따뜻했다. 그 학기를 등록하기 전 1년 동안 심적으로 꽤 힘들어했고 어느 정도는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지막 학기를 열정을 담아 열심히 다녀보자 다짐했었는데 한 달 만에 어처구니없는 멍청한 실수로 그 열정에 얼음물을 부어 버렸다.


나를 이해할 수 없었던 나는 그 날로 학교를 대충 다녔다. 새벽 늦게 잠들고 친구들이 점심 먹자고 전화를 하면 그제야 일어났다. 제대 후 갓 복학해 학점 채울 일이 막막하게 느껴지는 친구들은 어쨌거나 3학점만 남은 나를 부러워했고 나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고 있는 것 같은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마지막이 될 뻔했던 8학기 대학 생활은 구질구질했고 무기력했다. 이런 정신 빠진 인간을 받아 줄 회사는 어디에도 없을 것 같았다. ‘반쯤은 피로하고 반쯤은 쓸쓸한’ 날들이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태. 그때가 내 마음의 겨울방학이었던 것 같다. 다만 언제 시작하고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는 것이 진짜 겨울방학과는 다른 점이었을 것이다. 나는 다음 학년으로 넘어갈 수나 있을지. 다음 학년이 무슨 단계인지 조차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를 자책했고 그러다 기운이 빠졌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 안 천장만 보며 멍한 상태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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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밑에서 정상이 제일 높아 보이고, 길을 가는 중에는 내가 어느 지점에 서 있는지 정확히 모를 때가 많다. 그때 내가 어느 지점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영원히 그런 상태로 멈춰서 애매하고 무기력한 상태로 살 것만 같았고 그 생각이 나를 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이제 돌아보니 그때가 제일 깊은 골짜기에 멈춰있던 시간을 막 지나 조금씩 양지바른 곳으로 오르고 있던 중이었던 것 같다. 얼마 뒤 9학기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 몸의 무기력은 어쩔 수 없이 고쳐졌고 마음도 몸을 따라가는지 서서히 마음의 겨울 방학도 끝나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눈에서 비로 바뀌는 것을 알아채려면 잘 관찰하고 있어야 알 수 있는 것처럼 마음의 겨울이 끝났음을 알아채는 것도 내 마음을 예민하게 관찰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날들이 꽤 길었다.


사실 산 밑에서 정상이 제일 높아 보인다거나 동트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경점이다라거나 이런 말들을 썩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 말들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지금이 어둠의 끝자락인지 어둠의 초입인지는 당사자가 알기는 힘들기 때문에 나에겐 그 말이 위로일 수 없었다. 다만 이 어둠이 조금 밝아졌을 수도 있는데, 겨울이 지나갔는데 여전히 그 안에 서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건 아닌지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누구도 원해서 어둠에 빠지지 않을 것이고, 어쩌면 그 어둠을 겪지 않았다면 더 행복한 삶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겨울은 길든, 짧든 어떤 식으로든 끝나며 당신은 그 전보다 반드시 더 괜찮은 사람이 되어 있다는 것. 그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겨울이 꽤 길다는 생각이 든다면 당신의 마음을 한 번 들여다보기를. 당신의 생각보다 당신의 마음은 훨씬 괜찮아져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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