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밋빛 괴레메
카파도키아 여행의 첫 목적지는 괴레메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코스인 괴레메 야외박물관.
유럽여행 중 만나게 되는 정형화된 교회가 아닌 동굴 속에 만들어 놓은 교회와 수녀원을 볼 수 있기에 꼭 가고 싶었던 여행 포인트다.
괴레메 도심에서 동쪽으로 약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 경치 구경삼아 걸어가기 좋은 코스다.
우리 역시 항아리케밥도 소화시킬 겸 걸어서 목적지까지 이동하기로 했다.
내리쬐는 정오의 뜨거운 햇살을 피하기 위해 선물샵에서 커플 정글모도 구입해 여행기분을 내본다.
단돈 10리라(약 1200원)에 맛보는 소박한 여행의 맛이다.
태양은 뜨겁지만 건조하고 상쾌한 공기 아래 걷다 보니 발걸음이 가볍다.
길 양쪽으로는 누군가의 별장으로 보이는 고즈넉한 단독주택과 문을 닫은 리조트, 서너 마리의 말들을 사육하는 농장, ATV가 주차된 액티비티 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고깔 모양의 회색빛 바위들이 늘어선 낮은 언덕들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먹거리와 볼거리가 풍성한 관광지의 산책로는 아니지만, 카파도키아 여행의 시작을 알리기에는 더없이 좋은 산책 코스다.
경치에 감탄하며 조금 더 걸어가니 야외박물관 앞에 형성된 작은 상점거리에 도착.
걸어올 때는 보지 못한 관광객들이 많은 것을 보니 돌무쉬나 버스를 통해 온 듯하다.
약간의 관람료를 지불하고 야외박물관에 들어선다. 전시된 유물이 아닌 보존된 유적을 간직한 독특한 곳.
한때는 성직자와 수녀, 그리고 그들을 위한 제한적인 서비스가 제공되었을 작은 마을이다.
이곳에서 관광객들의 발길을 사로잡는 것은 독특한 이름의 동굴 교회들과 그 안에 그려진 가톨릭 성화들이다.
성화들은 잘 보존된 것들도 있기는 했지만 얼굴이 심하게 훼손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지배세력의 교체와 함께 국민들 삶의 목적과 방향을 규정하던 종교 세력 역시 교체된 것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다행히 이곳에 터를 닦고 동굴을 파내 살았던 이들의 삶의 양식은 훼손되지 않은 체 관광객들의 발길을 잡아끌고 있다.
카파도키아에서는 대부분의 일정을 투어로 구성했다.
우리가 가고 싶었던 장소들이 대부분 멀리 떨어져 있어 개인적으로 가기에는 무리가 있는 데다,
이미 카파도키아에는 테마별 투어가 잘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괴레메 주변의 관광지와 우치사히르를 둘러볼 수 있는 레드 투어, 지하도시와 으흘라라 계곡을 둘러보며 카파도키아 야생을 체험하는 그린투어 등, 시간만 허락한다면 모두 가보고 싶은 투어들 뿐이었다.
하지만 첫날 여행의 후반부를 책임진 투어는 레드와 그린이 아닌 로즈벨리 투어였다.
다음날 예약한 그린투어를 예약한 덕에 공짜로 체험할 수 있는 투어였는데,
막상 투어를 마무리했을 때는 값을 치르고 경험했어도 전혀 아깝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은 오후 5시, 숙소 인근의 투어 모임 장소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매일매일 모이는 인원이 다르다는 가이들의 설명을 들으며 투어 길을 나선 것은 가이드와 우리 둘, 그리고 혼자 여행 온 한국인 남학생, 총 4인이었다.
석양이 지기 전 장밋빛 빛깔을 뽐내는 산맥의 경치를 감상하는 게 주요한 테마인 로즈벨리 투어는 괴레메 주변의 독특한 기암괴석 사이를 걸어 다니는 것으로 시작됐다.
괴레메 야외박물관만큼 잘 보존되어있지는 않았지만 한 때는 사람이 살았을 동굴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한국의 유적이었다면 보존을 위해 휀스를 치고 막아 놓았을 법한 동굴과 지형들을 마음 놓고 둘러본다.
길인지 좁은 배수로인지 헷갈리는 투어코스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확인하는 방법은
“rose”라는 글자를 따라가는 것.
가이드 역시 자기가 없어져 길을 잃더라도 “rose”만 따라가면 된다고 일러준다.(일단 없어져서는 안 됩니다만^^)
아무리 독특한 관광지여도 비슷한 건물양식과 경치에 조금은 재미가 시들해질 무렵,
투어 이름에 걸맞은 장밋빛 산맥이 눈앞에 나타난다.
시간과 보는 위치에 따라 색상이 다르다고 하는데 우리가 도착한 시간에는 분홍 장밋빛 산맥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열심히 사진을 남기며 투어를 마무리하나 싶었는데, 가이드가 제법 높은 언덕으로 우리를 이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언덕 위에 북적인다.
석양을 보기 위해 모인 이들이 저마다의 언어로 저마다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장면이 우리와 다르지 않아 반갑다.
곧 석양빛에 물든 대초원과 그 뒤로 넘어가는 붉은 해의 모습을 담는 카메라 소리가 언덕을 뒤덮는다.
언덕 아래에는 고객들을 태우러 온 지프 랭글런과 ATV들이 시끄러운 엔진 소리를 뽐내는 중에, 반가운 “강남스타일”노래가 지프 지붕에 설치된 대형 오디오에서 흘러나온다.
흥 오른 여행객들이 지프 지붕에 올라 춤추고 환호하는 가운데, 귀신처럼 한국인 커플을 알아본 가이드 몇이 우리에게 스테이지를 권했지만 정중히 사양하곤 석양멍에 집중한다.
아름답지만 어딘가 서글픈 구석이 있는 지는 해.
이미 떨어진 석양 아래로 이제는 연보랏빛 장관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괴레메 파노라마도 분홍빛에서 보랏빛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사람과 문명이 제한된 드넓은 대자연 위에서 느끼는 자유와 일말의 오싹함, 그리고 그 순간 서로를 지켜주는 따듯한 파트너가 있다는 것에 안도하는 하루다.
저녁으로는 '한국인'여자사장님이 '터키인'과 결혼하여 차린 '중국'음식점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 식당은 카파도키아를 여행하는 여행객들에게 맛집으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세계의 모든 여행지들을 차례차례 점령 중인 중국인들뿐 아니라, 터키의 향신료와 특유의 날아다니는 밥에 지친 한국인에게도 필수 탐방지가 됐다.
터키음식에 딱히 거부감은 없었지만 식당 입구에서부터 은근히 풍겨오는 고소하고 매콤한 동양식 소스 냄새를 맡으니 여행의 피로가 말끔히 치료되는 기분이었다.
따듯한 밥과 뜨거운 국물, 잘 볶아진 야채를 먹어치우며 지난 일주일간 잊고 지냈던 한국이 문득 그리워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