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카파도키아
오늘은 카파도키아로 가는 날.
새벽부터 부지런히 짐을 싼다.
안탈리아에서 출발하는 가장 빠른 비행기를 예약했다 보니 여유 부릴 틈이 없다. 고양이들은 아직 잠들어 있을 시간에 조용히 마당을 가로질러 숙소 로비로 향한다. 트램도 운행을 하지 않는 개와 늑대의 시간.
전날 저녁 사장님의 주선으로 예약한 택시가 숙소 앞에 대기 중이다.
웃음 띈 얼굴로 무거운 트렁크를 택시 짐칸에 손수 옮겨주신 숙소 식구들과는 포옹과 손인사로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떠나는 날 새벽은 도착한 날 저녁처럼 시끄러운 트렁크 바퀴 소리 대신 노면을 부드럽게 쓸고 지나가는 택시 바퀴소리가 올드타운에 울려 퍼진다.
‘꼭 다시 만나요. 고마운 사람들, 그리고 아름다운 안탈리아.’
카파도키아는 터키의 중부 아나톨리아 일대를 가리키는 옛 지명이다. 소백산백 동남쪽의 경상도 일대를 영남으로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카파도키아라는 명칭은 아름다운 말들(kappa)이 있는 곳(dokia)에서 유례 됐다고 하는데, 내가 카파도키아에 묵는 동안 본 말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한 때는 지역의 명칭처럼 아름다운 말들이 넓은 초원에서 방목되고 길러졌겠지만, 지금은 여행객들의 새벽 트레킹 투어의 일부로 이용되는 몇 안 되는 개체만이 카파도키아를 지키고 있다. 다만 말들이 살았던 갈색빛 벌판과 사이사이 솟은 기암괴석들이 남아 지금의 카파도키아를 상징하고 있다. 지금 그 벌판을 달리는 것은 요란한 소리의 4륜 구동 ATV들이지만.
우리는 단체여행객들의 틈바구니에 섞여 카파도키아로 들어가는 관문인 카이세리 공항에 도착했다.
안탈리아의 따듯한 공기와는 사뭇 다른, 건조하고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자 카파도키아에 온 것이 실감 난다. 비행기에서 제공해준 샌드위치 하나가 오늘 먹은 음식의 다인 터라 차가운 공기가 한층 더 매섭다.
숙소가 있는 괴레메까지는 공항에서 돌무쉬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 괴레메는 인근의 우치히사르, 위르귑과 더불어 카파도키아의 가장 유명한 관광도시로 SNS에서 카파도키아라고 검색했을 때 보게 되는 벌룬, 너른 벌판, 독특한 형태의 기암괴석들은 이 도시들을 여행하다 보면 빠짐없이 볼 수 있다.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갈색 평원과 간간히 보이는 인가들을 스쳐 한 시간여를 달리다 보니 슬슬 우리의 목적지가 가까워진 것이 느껴진다. 갈색빛 초원 위에 우뚝 솟은 기암괴석들과 동굴집들, 구멍이 송송 뚫린 응회암 절벽들 사이로 길이 이어진다. 목적지 괴레메다.
돌무쉬에서 내리자마자 관광지 특유의 활기가 넘친다. 정류장 주변으로 각자의 고객들을 픽업하러 갈 젊은 짐꾼들이 손님들을 불러 세운다. 오토바이에 손님을 태우는 이, ATV나 소형 차량에 짐을 옮겨 실는 이, 아직 고객을 찾지 못해 부산히 돌아다니는 그들 덕에 차에서 내리자마자 정류장은 모래먼지와 외침 소리로 소란스럽다.
모래먼지 뒤로는 가파른 비탈길을 빼곡히 채운 회색빛 응회암 집들이(또는 동굴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흡사 거대한 계곡에 만들어 놓은 인간의 마지막 피난처 같다. 아쉽게도 우리 피난처는 따로 픽업 서비스가 없어 걸음을 재촉한다.
숙박 어플에서 카파도키아를 검색하면 숙소 명칭에 'CAVE'가 들어간 곳을 심심치 않게 확인할 수 있는데, 해당 명칭이 들어가는 곳은 카파도키아의 자랑인 회색빛 응회암 동굴을 활용한 숙박업소이다. 단, 동굴 호텔 체험에 대한 수요가 워낙 많아 정말 이국적인 동굴 방을 예약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우리 역시 이름은 동굴 호텔이지만 일반적 호텔 스타일의 방을 예약할 수밖에 없어 아쉬움을 삼켰다. 어찌 되었든 응회암 재질의 벽돌로 만들어진 방에 묵긴 했으니 맛은 본 셈이지만 말이다.
한국전쟁 참전용사를 아버지로 둔 사장님의 너스레 덕에 다소 긴 체크인 시간을 들인 후, 지체 없이 점심식사를 위해 도시로 내려갔다.
본인 이름을 대면 10% 할인쯤은 문제없다는 사장님의 추천을 믿고 선택한 곳은 인근의 케밥 식당. 특히 항아리 케밥이 유명한 맛집이다. 주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앙증맞은 크기의 항아리 두 개가 넓은 입구 쪽을 맞댄 채 둥그런 접시에 담아 나온다. 곧이어 사장님이 능숙하게 두 항아리 사이를 작은 망치로 두드리면 틈 사이로 먹음직스러운 육수와 수증기가 흘러나온다. 사장님이 추천한 맛집답게 맛도 우리 입맛에 맞았다.
계산 시에 자연스럽게 사장님 이름을 대며 어필을 했지만, 받아 든 계산서에 할인의 흔적은 없었다. 터키 사람들의 유쾌한 허풍은 카파도키아에서도 다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