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바다
안탈리아 올드타운은 항구를 중심으로 상가와 주택들이 방사선으로 뻗어 나가며 형성된 구역이다. 곳곳에는 오래된 역사를 증명이라도 하듯 하드리아누스 아치, 케식 미나레, 이볼디 미나레 등 볼거리가 다양하다. 꼭 서울의 북촌이나 서촌처럼 오래된 가옥들을 개조해 식당, 상점, 카페로 문을 연 곳이 대부분이라 어딜 가던 예스러운 멋이 있다. 특히 하얀 요트들이 정박한 항구와 잔잔한 바다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절벽에 위치한 레스토랑과 카페들은 언제나 사람들로 붐빈다.
우리는 아침 일찍 작은 숙제(셀프 웨딩촬영)를 끝마친 터라, 홀가분한 마음으로 조용한 오전의 항구와 주변을 걸었다. 따듯한 햇살 아래 관광객들이 아직 몰려들지 않은 조용한 올드타운은 어딜 걷던지 산책코스로 안성맞춤이다. 항구에서 시작해 바다와 도시가 어우러지는 멋진 뷰가 있는 해안가 산책로를 거닐고, 정해진 목적지 없이 걷다 보니 골목길 속에 숨어있는 카펫 상점에 다다랐다. 아직까지 한 번도 지갑 걱정을 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장만할 신혼집(?)에 둘 요량으로 고른 작은 카펫 가격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꼭 필요한 게 아니니 다음을 기약하며 가게를 나섰다.(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사둘걸 그랬다. 또 언제 갈 수 있으려나.)
거의 오픈 타임에 맞춰 뷰가 유명한 카페에 들르기도 했는데, 역시 가장 좋은 자리들은 우리보다 더 부지런한 손님들이 차지한 후.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마음에 드는 자리에 앉아 올드타운의 베이지색 항구를 감상했다. 항구라고 해도 어선들이 드나드는 항구가 아닌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유람선을 운영하거나 개인 요트들이 즐비한 곳이라 항구 특유의 발랄함은 부족했지만, 쌉싸름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가만히 항구를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오래된 휴양지의 정제되고 착실한 안정감이 기분을 적셔준다.
아침을 늦게 먹은 터라 늦은 점심을 먹기로 하고, 카페에서 운영하는 프라이빗 비치로 이동하기로 한다. 안탈리아를 여행하게 된다면 해안가 절벽을 소유한 숙소를 심심치 않게 찾을 수 있는데, 카페와 식당을 겸하기도 한다. 일부 숙소는 해당 숙소에 묵지 않는 고객에게도 프라이빗 비치에 소정의 입장료를 받고 입장을 허가해주고 있다. 바다의 일부를 개인이 소유한다는 게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공공을 위한 해안가에 허가되지 않은 개인 텐트를 치고 여기저기 쓰레기가 방치되는 우리나라의 일부 해변을 생각하면 어느 하나의 방식만 고집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가 방문한 카페는 레스토랑과 카페, 그리고 프라이빗 비치를 함께 운영하는 곳이었다. 소정의 입장료를 내고 프라이빗 비치로 이동한다. 깎아지르듯 높은 절벽에 만들어놓은 좁은 계단을 조심스레 내려간다. 절별 아래로는 붉은색과 하얀색이 교차로 있는 커다란 왕사탕 같은 둥근 파라솔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30여 명 정도의 인원, 어쩌면 그보다 더 소수의 인원에 알맞은 프라이빗 비치다. 작은 만으로 형성된 암반 지형에 파라솔을 놓을 수 있는 시멘트 구조물이 튼튼하게 설치되어있고, 옆으로는 아이들이 뛰어노는 작은 모래사장, 잔잔한 에메랄드 빛 바다가 어우러져 있다. 완벽하다.
9월 말이지만 정오가 넘어가니 아직은 햇살이 따갑다. 둘 모두 이중으로 선크림을 덧칠한 체 파라솔 밑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마저도 그녀는 선캡을 가져올 것 그랬다며 아쉬워한다. 프라이빗 비치에서 아마 가장 하얀 것은 그녀였을 텐데도 말이다. 오래 누워있기엔 조금은 불편한 비치배드에 누워, 나는 터키 여행 책자를, 그녀는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를 읽었다. 오랜만에 보는 한글이 반갑다.
독서로 시간을 보내다 자리를 털고 바다에서 약간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프라이빗 비치도 이용시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 튜브와 오리발을 대여하여 바다로 헤엄쳐 가본다. 멀리 프라이빗 비치의 바다 쪽 경계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놀기도 하고, 만 앞에 있는 제법 높은 바위에서 거침없이 몸을 던지는 이들도 있다. 나는 겁이 매우 많기 때문에, 그녀는 수영을 배우지 않았기에 멀리까지 나가진 않고 가까운 바다를 즐긴다. 그렇게 비치에서의 시간이 잘 마무리돼가고 있던 찰나, 내가 다시 사고를 하나 치고 말았다. 그녀에게 괜스레 우쭐대며 나름 자유형, 배형, 평형까지 마스터한 몸이라며 오리발 없이 놀다 날카로운 암반에 엄지발가락을 베이게 된 것. 발가락에 피를 흘리며 뭍으로 올라가 세이프가드에게 다가가니 딱한 표정으로 묵묵히 상처를 치료해준다. 그의 신속한 치료 덕에 이후로는 별 탈 없이(?) 프라이빗 비치에서의 추억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치료 중 서로의 여자 친구를 소개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자연스럽게 친구가 된 구릿빛 피부를 빛내던 세이프가드는 지금도 잘 있을는지. 다시 한번 “사으 올”
오후에 방문한 콘얄트 비치는 올드타운의 프라이빗 비치와는 많이 다르다. 지중해에서 가장 긴 해변을 자랑하는 이곳은 일단 활기가 넘친다. 멀리 해변 끄트머리에는 올림포스 산이 바다와 안탈리아를 내려다보고 있고, 유쾌한 파도가 지치지도 않고 모래사장을 간지럽힌다. 한쪽에서는 가족여행을 나온 이들의 기분 좋은 수다 소리가 들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비보이 공연, 단체 요가교실 등이 벌어진다. 멀리 서는 고속 보트에 매달린 패러글라이더가 자유롭게 날고, 자전거를 타고 쏜살 같이 친구를 추격하는 아이들, 정답게 손을 잡고 바닷바람을 즐기는 노년의 부부가 넓은 콘얄트 비치를 사이좋게 나눠 쓰고 있다. 멀리서 9월을 즐기러 온 우리 역시 그중 일부를 빌려본다.
목적지 없이 걸으며 도란도란 지나온 일들과 벌어질 일들을 얘기하다 사위가 어두워지는 시간이다. 콘얄트 비치를 즐기던 이들은 저마다 생각해둔 저녁을 먹으러 하나 둘 자리를 옮긴다. 오랜만에 아무런 맛집 검색 없이 야외에 테이블을 올려놓은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해는 저물고 있고, 보랏빛을 띠는 하늘과 식당의 할로겐 조명은 라라 랜드의 한 장면처럼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곧이어 우리 앞에는 맥주와 치킨이 놓인다. 즐거운 저녁이다. 저마다의 테이블에서 서로 다른 언어로 서로 다른 이야기 나누고 있지만, 빛나는 눈으로 상대방을 응시하는 것은 동일하다. 한 순간 이곳에 모인 모두가 친구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우리 역시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며 멀리서 들려오는 바닷소리와 식당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 그리고 사람들의 소음을 기분 좋게 들으며 그곳에서의 마지막 밤을 맞이했다. 물론 옆자리에서 물담배를 피우는 이들을 보고 용기 있게 물담배를 주문하려는(주문표에 물담배가 있다!) 그녀를 간신히 막아낸 다음에 말이다.
해가 떨어진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나는 아직도 더 놀고 싶다는 듯 백사장을 뛰노는 강아지들, 전력질주로 그 강아지를 쫓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을 다시 쫓는 부모를 지켜보며 우리는 다사다난했던 하루, 행복했던 안탈리아에서의 시간을 매조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