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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충작가 Sep 26. 2021

터키는 저도 처음입니다만 - 3화

제 가방 보신 분?

 우리 숙소의 업무분장은 다음과 같다.

 묵묵하지만 밝은 얼굴을 가진 직원 두 분의 룸 컨디션 체크 및 아침식사 준비.

 유쾌한 남자 사장님의 세부 업무내용 지시 및 여행객 관리.

 그의 모든 행동에 결재권한을 쥐고 있는 여자 사장님의 명확한 의사결정.

 그리고 그들을 집사로 거느리는 고양이 여덟 마리의 느긋한 삶.

 우리는 이러한 명확하고 상호의존적인 공동체가 운영하는 앤티크 호텔에 초대된 어린 커플이었다.

아침인사를 나온 고양이와 아침 디저트로 나온 수제 초코 파운드케이크

 늦은 저녁 안탈리아에서의 첫 만남부터 카파도키아로 떠나던 아침까지 이어진 이들의 호의와 서비스는 안탈리아에서 보낸 시간을 따듯하게 밝혀주었다.

안탈리아에서의 여해은 하루하루가 선택적 강행군이었지만 지친 다리와 뻐근한 어깨를 뉘일 수 있는 숙소가 있다는 사실 덕분에 우리는 다시 걸을 수 있었다. 언젠가 터키를 다시 찾게 된다면 꼭 다시 묵고 싶은 그곳, 보고 싶은 그들.


 남자 사장님은 매일 아침 부지런히 산책을 나가는 우리를 보고 익살스러운 표정과 오른팔에 알통을 만드는 동작을 취하며 말했다.

"Super~~!!"

 하지만 이 날 아침은 내 뒤에 따라 나오던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인사 대신 감탄소리만 내뱉으실 뿐이었다. 셀프 웨딩촬영을 위해 한껏 차려입은 그녀가 나타났기 때문. 터키 여행을 계획하며 나중에 있을지도 모를 결혼식을 위해 미리 셀프 웨딩촬영을 하기로 계획했었고, 안탈리아에서 일기예보가 가장 좋았던 셋째 날을 D-day로 잡아놓았다. 예보대로 오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우리를 지켜보는 날이었다. 미리 준비해둔 하얀색 드레스와 멋스러운 플랫슈즈, 그리고 입술색과 어울리는 자주색 장미꽃을 손에 든 그녀는 정말 예뻤다. 이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나도 하얀 리넨 셔츠와 베이지 코튼 팬츠, 밤색 아이언레인저로 멋을 냈다.

셀프 웨딩촬영날 아침의 날씨와 촬영장소들
 우리는 여느 다른 커플들처럼 결혼 준비에 많은 고민과 시간을 쏟았었다. 한번 있는 결혼식에 남들이 하는 것들은 다 해볼지, 스몰웨딩으로 간소한 식을 치를지, 답 없는 고민을 이어가다 결국 야외 스몰웨딩으로 계획을 잡고 노력했었다. 막상 식을 앞두고는 코로나19 덕에 우리가 당초 계획했던 결혼식은 올리지 못했지만, 우리는 지금도 주말이면 여행을 계획하고 시시콜콜한 회사 이야기를 나누다 저녁 메뉴를 정하는데 하루 중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이며 살고 있다. 원하던 대로 되지 않을 일이 많을 요즈음이다. 영화 비포선셋의 명대사처럼 답은 늘 그 과정 속에 있다고 믿는 수밖에.


 젊은 패기와 자신감으로 무장한 우리는 이른 아침의 안탈리아 올드타운을 누볐다. 고풍스러운 나무 기둥과 파스텔톤 페인트가 칠해진 아름다운 건물 앞, 덩굴나무로 둘러싸인 아치가 늘어선 평범한 어느 골목, 구멍이 송송 뚫린 하얀색 철제 차고 셔터 옆, 며칠간 산책으로 눈여겨본 곳들이 야외 촬영 장소로 변했다. 마침 우리 부모님 세대들로 구성된 한국인 관광객분들이 우리가 셀프 촬영을 하던 이른 아침에 올드타운을 투어 중이셨는데 , 하나같이 우리 모습을 어여삐 여겨주시고 또 응원해주셨다. 그때는 그분들의 시선에 선글라스로 붉어진 얼굴을 조금 가리긴 했었지만 말이다.

올드타운에서의 셀프 웨딩 촬영


 그런데 이 즐겁고 아름다운 추억에도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사진 촬영 막바지에 와서야 계속 들고 다니던 가방이 없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날따라 여권과 지갑, 숙소 키 까지 다 넣어둔 보물단지를 잊어버렸으니 순간적으로 등에 식은땀이 나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나와 그녀는 숙소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과 함께 예쁘게 손질한 머리가 다 풀어지도록 올드타운을 누볐다. 금방까지 아름답기만 하던 도시의 외진 구석구석이 원망스럽고, 신뢰가 가지 않는 음침한 골목으로 변했다. 왔던 길을 돌고 돌고 또 돌았지만 수확은 없었다. 기진맥진한 몸과 마음으로 우리의 흔적을 돌이키며 당장 현지 경찰서와 대한민국 대사관에 연락을 취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만약 연락한다면 어떻게 연락을 해야 할지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숙소로 향하려는데, 나의 검은색 사이드백을 들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살피는 외국인 부부를 만났다. 포기와 걱정의 시선이 교차하던 그곳에서 우리는 서로를 알아봤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 후, 서로가 어디에서 온 누구인지 짧게 이야기하다 보니, 내 가방을 찾아준 분께서 미국에서 경찰을 업으로 삼고 계시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 기막힌 우연, 놀라운 행운에 나는 다시 한번 이번 여행은 정말 배울 것이 많은 여행이구나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웃는 얼굴을 하고선 가방에 들어있던 지갑 속의 신분증 사진과 내 얼굴을 번갈아 확인하던 그 노련함까지 어찌나 믿음이 가던지. 신원확인 절차 후 가방을 넘겨받은 나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고선 갑자기 찾아온 안도감에 다리에 힘이 느린 걸음으로 숙소로 돌아왔다. 그녀 역시 허탈하게 숙소에 앉아있다 가방을 메고 들어오는 나를 보고 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침에 숙소를 나올 때 까지는 그렇게 예쁘기만 하던 그녀가, 지금은 땀투성이에 기진맥진한 몸을 의자에 기대고 있는 지친 여행객이 되어있었다.

‘미안, 그리고 고마워.’

올드타운은 그냥 그 자리에 있었지만 나는 그곳을 사랑하다가 또 싫어하다가 결국엔 다시 사랑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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