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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충작가 Sep 12. 2021

터키는 저도 처음입니다만 - 2화

태양의 도시 시데, 여행자 그리고 이방인

 셋째 날 목적지는 태양의 도시 시데.

 바닷가에 인접한 아폴론 신전과 내륙에 있는 고대 원형 극장, 소박한 바다와 낭만적인 해변을 모두 가진 관광도시다.

당일 오후 비가 올 수도 있다는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아침 일찍부터 안탈리아 오토가르로 향했다. 안탈리아에서 시데까지 직행버스 티켓은 없고 시데에서 5km 정도 떨어진 마나브갓이란 도시를 경유하는 것이 시데에 가는 일반적인 경로다. 우리는 마나브갓과 시데로 갈라지는 분기점에 내려 터키식 마을버스 '돌무쉬'를 타고 시데로 들어가는 방법을 택해 시간을 더 아끼기로 했다.

시데로 떠나는 날 아침 산책길의 안탈리아, 그저 평화롭다.

 터키에서 여행자와 현지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이동 수단은 버스다. 이스탄불-안탈리아 간 여행처럼 장거리에다 출발지와 도착지에 공항이 위치한 곳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이동은 버스로 이루어진다. 장거리 이동의 경우 야간 버스를 주로 이용하는데, 터키 최서단 이스탄불에서 터키 최고봉인 아라라트산(해발 5,137m)이 있는 터키 최동단까지 23시간을 달리는 야간 버스도 있다.(이동거리 약 1500km, 서울-부산 간 이동거리는 약 400km) 안탈리아는 유명 관광지답게 버스터미널이 잘 갖추어져 있다. 주요 관광지인 올드타운에서 신식 트램(메트로)을 타고 20여분을 달리면 도착하는 '오토가르'가 그곳. 우리나라로 치면 고속버스터미널과 시내버스터미널이 통합된 형태의 다목적 터미널인데, 터키 대부분의 도시로 향하는 티켓을 구할 수 있다.(경유도 포함) 단, 티켓을 구할 수 있다고 했지, 어떤 방식으로 목적지로 갈지는 모른다. 정말이다.


 오늘 어떤 일이 벌어질지 꿈에도 모르는 커플을 태운 버스가 익숙한 엔진 냄새를 풍기며 출발한다.

그런데 목적지까지 힘차게 달릴 것 같던 버스가 도시를 벗어나지 않고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왜지? 엔진에 문제라도 생긴 걸까?’

의문을 답은 금방 해결됐다. 추가 승객이 버스에 탑승하거나 소포들이 버스에 실리고 있었다. 분명 버스 정류장 표지는 없었는데 말이다. 승객과 짐을 실은 버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몇 번이나 가고 서기를 반복했다. 알고 보니 우리가 탄 버스가 마나브갓과 시데 분기점에서만 정차하는 버스가 아니라 안탈리아와 마나브갓 사이에 여러 정류장에 들르는 시외버스였던 것. 적응이 안 되는 느린 속도에 여행시간이 줄어들까 아쉬워하고 있는 우리와 달리 탑승객은 당연하다는 듯 태연해 보였다.  버스가 오는지 모르고 있던 모녀에게 클락션으로 도착을 알리는 느긋한 기사님의 모습은 자뭇 인정 넘쳐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한 시간을 달린 버스가 마나브갓과 시데로 이어지는 갈림길 앞의 한 주유소에 정차했다. 이방인임을 잠시 잊고 버스 앞자리에서 꾸벅꾸벅 졸던 우리는 버스기사님의 우렁찬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시데!"

정신 차린 이방인 둘이 부산하게 자리에서 짐을 챙기자, 버스 기사님이 다시 외쳤다.

"시데!!"

급하게 짐을 챙겨 내리려는데 기사님이 내 어깨에 손을 척 올리고 말했다.

"친구, 저기 보이는 하얀색 ‘돌무쉬’를 타면 시데까지 바래다줄 거야. 돈은 내가 미리 내놨으니 걱정 마."

틀림없이 하얀색 돌무쉬 한 대가 주유소에 정차해 있었다. 돌무쉬는 우리나라의 유치원 버스와 비슷한 크기였는데, 유리창에 큰 글자로 ‘시데’가 적혀있었다. 감사 인사를 위해 버스 쪽을 돌아봤지만 버스는 이미 출발한 후였다. 우리는 그렇게 터키식 마을버스인 돌무쉬를 타고 목적지인 시데에 도착했다. 물론 비용은 우리가 냈다.


오토가르에서 유적지까지 가던길에 있던 평범한 레스토랑, 식전빵이 일품

 여행 중 방문했던 터키 식당에서는 언제나 식전 빵과 올리브를 내어줬다.

식전 빵은 담백한 평범한 밀가루 빵이었는데 짜고 단맛이 없이 담백한 맛이 일품이었고, 함께 나오는 올리브 열매 절임은 소금에 절인 것부터 살짝 고춧가루를 버무려 매콤한 맛이 나는 것, 건포도처럼 바짝 말린 것 등이 있는데(맛은 일반 올리브지보다 조금 더 새콤하다), 우리로 치면 단무지나 김치 정도 되는 위치의 반찬 같았다. 필요한 하루치 나트륨은 이 올리브 절임에서 모두 섭취할 수 있을 것 같은 올리브 절임을 입에 물고, 따듯한 식전 빵을 먹으면 거창한 다른 음식이 생각나지 않는다. 게다가 이 빵은 원하면 언제든지 리필까지 된다. 어째서인지 나는 터키 여행에서 들른 식당의 식전 빵과 올리브 절임은 절대 남기지 않았다. 당신들의 호의를 나는 무시하지 않겠소 하는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식전 빵을 다 먹고 나온 닭고기 케밥과 터키식 피자인 ‘피데’는 담백하고 솔직했다.


중후한 시데의 원형극장

 시데는 고대 로마 유적이 많이 남아있는 도시다. 시데 오토가르에서 관광지까지 가는 길에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유적은 고대 원형극장이다. 2세기에 지어졌다고 하는데 보존 상태가 우수해서 아직도 실제 뮤지컬과 오페라가 열린다고 한다.

30리라를 내고 극장에 들어서면 먼저 가파른 계단과 습한 돌 냄새를 마주해야 하지만, 객석 최상단에서 볼 수 있는 장엄한 구도시와 극장의 콜라보를 보기 위해 조금만 참아보자. 객석에 앉아 공연을 관람하고 싶어지는 중후하고 아름다운 시데 원형극장은 객석 최상단에 올랐을 때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한번쯤 해야하는 포즈, 멀리 모래폭풍속에서도 빗나는 전우애
시데로 들어서는 길목, 하늘이 심상치 않네…

 SNS에서 ‘시데’를 검색하면 폐허가 된 아폴론 신전 기둥을 뒤로한 사진이 넘쳐난다. 우리 역시 그 인증샷을 남기기 위해 이곳에 왔다. 첫 번째 목적지였던 원형극장에서 많은 사진들을 남기고, 다음 목적지인 아폴론 신전을 향해 걸었다. 길 곳곳에 휴양지 특유의 너스레 섞인 상인들의 인사가 평화로웠다. 그런데 살랑살랑 불어오던 실바람이 점차 사나워지더니 거센 바람과 함께 비가 한 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날씨 앱을 통해 확인한 것보다 훨씬 더 이른 비였다. 상인들은 하나둘씩 가게문을 닫았고, 우리는 걸음을 서둘러 아폴론 신전으로 향했다. 신전 주변에는 이미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는데 열심이었다. 우리처럼 비 소식에 놀라 급하게 사진을 찍는 이들도 있었지만, 비는 아랑곳 하지 않고 느긋하게 여러 포즈로 추억을 남기는 이들(모래폭풍 속에서도)도 있어 감탄하기도 했다. 그리고 옆에서 그런 관광객들을 지켜보던 바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둡고 무거운 파도가 일렁이는 무서운 바다로 변해가고 있었다.  


아폴론 신전은 왜 하필 그곳에 서 있었을까. 로마제국 시대에도 이곳에선 변화무쌍한 비바람이 불었을 테고, 생업을 위해 바다로 나간 가족들을 위해 남은 가족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바다 한편에 마련된 신전에서 드리는 기도뿐이지 않았을까. 그만큼 그날 우리가 느낀 파도는 맹렬했고 바람은 사정이 없었다.


 바람 뒤에 이어진 비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굵어졌다. 다행히 비바람에 이어 천둥소리까지 울려 퍼지던 시점에 가까스로 오토가르에 도착했고, 곧이어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오토가르는 이미 시데의 거친 환영인사에 반쯤 넋이 나간 여행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예상 못한 비는 아니었지만, 폭우를 생각하지는 못한 우리도 조금은 의기소침해지려던 찰나, 어느샌가 우리 곁에 고마운 친구가 와있었다. 긴 털이 눈을 간지럽히는 꼬장꼬장한 회색털의 해맑은 강아지였다. 이런 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우리 옆에서 애교를 부리는 태연한 강아지 덕택에 우리도 언제 계획이 틀어졌냐는 듯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고마운 친구와 시간을 보내다 보니 오토가르로 돌무쉬 몇 대가 연속해서 들어왔다. 이제 돌무쉬에 올라타 오전에 시데에 온 방법의 반대로 안탈리아에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시데에서의 하루는 그렇게 손쉽게 마무리되지 못했다.

고마운 털뭉치 친구

 

 함께 비를 피하던 수많은 인파들에 휩쓸려 어느 돌무쉬에 탑승하게 됐는데, 나는 몇 번이나 기사에게 ‘안탈리아’를 외쳤고, 기사님 역시 알겠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돌무쉬가 어디로 향할지 모른 체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오전에 터키 버스기사님의 시크한 듯 따듯한 정을 느꼈기에 덜컥 마음을 놓아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를 태운 돌무쉬는 유유히 본인의 목적지로 나아갔다. 시간이 지나도 하차할 주유소가 나타나지 않아 뒤늦게 휴대폰을 열었을 때는 이미 우리는 우리가 내려야 할 곳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뒤늦게 기사님께 상황을 설명하고 다음 플랜을 생각하고 있던 사이, 버스 안에 덩치는 크지만 얼굴은 앳된 현지 소년들이 우리를 몇 번씩 흘겨보더니 이윽고 장난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어디서 왔니.’

 ‘중국인 아냐? 꼭 재키 챈같다.’

 그들은 나의 대답을 따라 하며 불쾌한 제스처를 이어갔고, 불필요한 문답이 계속 이어지려 할 때 그녀가 상황을 정리했다.

 ‘우린 여행 중이니 그만 신경 끄고 갈길 가줄래?’

 일순간 버스 안에 적막이 감돌았고,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우리 나이 또래로 보이는 현지인 대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주의를 주고 우리에게 사과를 청했고, 여행이 잘 마무리되길 기원한다며 거듭 사과를 보내왔다. 우리 역시 그들의 호의에 감사하며 힘을 냈다. 터키 소년들도 그 후로는 말썽을 부리지 않고 얌전히 버스에서 하차했다. 그렇게 우리를 태운 버스가 오랜 시간 끝에 향한 곳은 마나브갓 오토가르였다. 알고 보니 우리가 탄 돌무쉬는 시데와 마나브갓 사이를 운행하는 마을버스였던 것. 돌무쉬 기사님은 오토가르에 도착해서도 우리를 이끌고 안탈리아행 버스를 탈 수 있는 곳까지 안내해줬다. 속으로 기사님을 탓하고 있었던 내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기사님은 우리가 버스에 타는 것을 확인하곤 다시 본인의 돌무쉬로 돌아갔다.

‘사으 올룬’

(대단히 감사합니다.)  


 안탈리아로 돌아오는 버스는 역시 완행이었고, 만원이었다. 그녀와 나는 말이 없었고 바닷바람에 시달린 얼굴은 푸석했다. 어제와는 너무 다른, 지친 하루였다.

안탈리아 오토가르에 내려서는 서로 상의할 것도 없이 택시를 불러 숙소까지 향했다. 따듯한 물과 포근한 침대, 친절한 사람들이 절실했다. 숙소에 도착하니 호스트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우리를 맞아줬다. 고작 이틀 밤을 보낸 곳이 집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캐리어에 담아왔던 컵라면 2개로 저녁을 해결했다. 공허하고 상처 받은 몸과 마음에 따듯한 국물과 친근한 MSG향이 퍼지자 이내 안도감이 몰려왔다.  

 들뜬 이방인들은 터키인들의 따듯함과 여행의 안락함에 자신만만한 여행자가 되었고, 비바람과 인종차별에 다시 이방인이 되었으며, 컵라면을 후후 불어가며 그 중간 어디쯤의 우리 자리를 조용히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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