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룬과 그린투어
카파도키아에서의 이튿날, 새벽 일찍 알람이 울린다.
나는 눈꺼풀이 무겁기만 한데 부지런한 파트너는 벌써부터 커튼 너머 창밖 구경에 한창이다.
“오빠, 어른 일어나.”
“지금 몇 시야?”
“5시 반, 곧 시작이야.”
숙소 야외 테라스 테이블에 자리를 잡으니 어두운 마을 곳곳에서 부산스런 소리들이 들린다. 사람들의 작은 대화 소리, 카메라 셔터음, 오래된 나무 데크가 끼익끼익하는 소리.
카파도키아 여행의 상징과도 같은 벌룬을 보려 모여든 사람들이다.
새벽의 남색 괴레메 초원 너머로 하나 둘 작은 불빛이 보이면 이제 벌룬 투어가 시작된다는 신호다.
곧이어 LPG가스로 몸체를 부풀린 거대한 벌룬들이 여행자들의 꿈을 싣고 하늘로 오른다.
벌룬투어는 돈을 지불했다고, 또 내가 부지런히 새벽에 일어났다고 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날은 바람이 많이 불어서, 어떤 날은 너무 추워서, 또 어떤 날은 예상치 못한 시행사 측의 예약 취소 등으로 기껏 카파도키아에 오고서도 벌룬 투어를 못하고 돌아가는 여행자가 부지기수다.
우리의 경우는 그냥 내가 겁쟁이라 못탔다.(^^;)
둘은 다행스러움과 아쉬움을 교차하며 운좋은(어쩌면 누군가에겐 운없는?) 이들의 벌룬투어를 관람했다.
점차 밝아오는 여명을 배경 삼아 저마다 다른 색상과 자태를 뽐내며 하늘로 오르는 벌룬들을 감상하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멋진 여행코스였다.
초원 저 멀리서 떠올라 마을 쪽을 향해오는 벌룬, 마을에서 시작해 초원으로 나가는 벌룬들이 영화 바닐라스카이가 떠오르는 하늘을 사이좋게 가로지른다.
조금 떨어진 테라스에서는 한 커플이 프러포즈를 주고받고, 또 어떤 이들은 조용히 손을 잡고 그 시간을 음미한다.
여행의 피로를 잊고 낭만에 빠지기 완벽한 순간이다.
이른 새벽 우리에게 멋진 벌룬 뷰를 허락해준 카파도키아 숙소는 괴레메 마을 남쪽 사면에 위치한 작은 호텔이었다.
여행 첫날, 첫인상이 매서웠던 남자 사장님은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는 인사말을 듣자 곧 터키인 특유의 넉살과 밝은 웃음으로 우리를 반겨주었다.
무려 그의 아버님이 한국전쟁 참전용사였기 때문. (‘We are from Korea...South Korea’라는 부연설명이 이번처럼 적절했던 적이 있었을까.)
그가 자랑스레 보여준 아버지의 흑백사진 속에는 사장님의 젊은 시절 사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와 비슷한 젊은이가 앉아있었다.
지금의 나와 비슷한 또래의 이 젊은 터키인이 어떤 마음으로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까,
어쩌면 장성한 그의 아들과 그가 젊음을 바친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온 청년이 훗날 그의 이야기를 나누게 될지도 모른다고 상상해보았을까?
사장님은 이런 내 감상과는 별개로, 짧은 가족소개 후 앞으로의 여행일정 추천과 그에 필요한 돌무쉬 예약 등을 일사천리로 처리해 주었고,
대용량 올리브 오일 세니타이져 선물과 현지맛집(할인은 안되도 맛은 있었다!) 추천까지 끝내고서야 마지막 악수를 건넸다.
처음 만나는 이들과 이토록 예상치 못한 호감을 가질 수 있는 것 또한 여행의 묘미 중 하나가 아닌가.
사장님이 예약해준 돌무쉬를 타고 오늘의 여행, 카파도키아 그린투어를 시작한다.
거리가 꽤 먼 관광명소들을 한 세트로 둘러볼 수 있는 코스로 여행객들에게 인기가 많다.
데린쿠유 지하도시, 셀리메 수도원, 으흘라라 계곡을 두루 돌다, 터키석과 줄타나이트 보석 상점의 유혹을 이겨내고,
가이드가 한사코 본인과는 아무 관계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보면 볼수록 굉장히 끈끈해 보이는 선물가게에 들러 아껴뒀던 지갑을 열면 얼추 마무리되는 코스다.
우리가 돌무쉬에 오르자 미리 타고 계시던 60대 부부가 반가운 한국어로 인사를 건넨다, 곧이어 용감하게 터키를 누비는 두 남자 대학생(둘은 서로를 모른다.),
신혼여행 중인 커플까지 전원 한국인으로 구성된 오늘의 투어팀이 완성되고, 화룡정점으로 한국말이 유창한 가이드 ‘잼’이 투어를 이끈다.
여러모로 한국 생각이 많이 나는 날이다.
첫 목적지인 크줄추크르 계곡(Kizilcukur Valley)은 카파도키아 특유의 지형들을 높은 고도에서 볼 수 있는 곳으로 로즈벨리 투어 때와는 크게 다르지 않은 광경을 즐길 수 있었다. 일몰 스팟으로 유명한 곳이라고 하니, 그린투어를 일찍(정말 일찍) 시작하는 팀들에게 안성맞춤이 곳이 아닐까 싶다.
역시 남는 건 사진뿐이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사진을 남기고, 마음 편한 한국어로 커플사진 부탁도 해본다.
돌무쉬를 꽤나 달려 도착한 두 번째 목적지는 셀리메 수도원(Selime Katedrali), 역시 전날 방문했던 괴레메 야외공원과 비슷한 형식의 수도원들이 주요한 볼거리다.
스타워즈 촬영장의 모티프(촬영 장소는 아니다!)가 된 곳으로, 영화팬들이라면 왠지 가슴 설레는 곳이다.
자리를 옮길 때마다 뷰가 괜찮은 곳에서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고 있노라면 우리 뒤로 자연스럽게 다른 여행자들이 줄을 섰다.
유명한 사진 스폿인가 했는데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그냥 평범한 동굴 구멍 앞이나 그늘 아래였다.
국적을 떠나 아름다움을 느끼는 기준이 비슷한 게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어쩌면 시종일관 웃고 떠드는 목소리 큰 소녀가 이뻐 보여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수도원을 걷다 보면 '진짜' 유명한 포토 스폿도 더러 있었는데, 뜨거운 태양 아래 줄 서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인생 샷을 건지는 이들이 미워 매서운 눈빛을 보내곤 했다.
재밌던 점은 어쩌다 마주친 대기행렬 속의 외국인의 눈도 나와 똑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것.('우리는 빨리합시다' 하고 짧은 눈빛을 교환해본다.)
세 번째 목적지는 으흘라라 계곡(Ihlara Valley)이다.
계곡 밑으로 내려가는데만 한참이 걸리는 이곳은 100m가 넘는 암벽으로 둘러 쌓여있다.
강줄기를 따라 무성한 수풀과 울창한 나무들이 자라고 있어 마음만 먹으면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숨겨진 마을이 있을 것만 같은 장소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한 것이 내가 처음은 아니어서, 초기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이곳으로 숨어들었다고 한다.
그린투어 중 가장 기억에 남은 장소로, 30분에서 2시간가량 트레킹 코스를 따라 계곡의 자연을 음미하며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치유된다.
중간에 관광객들을 위한 상가들이 형성되어 있는데, 오리들이 떠다니는 강 위에 제법 큰 규모의 카페 겸 식당도 운영되고 있다.
식전 빵을 미끼로 쓴 이들 주위로 모여든 오리들을 구경하는 것은 또 다른 재미.
마지막 목적지는 데린쿠유 지하도시(Derinkuyu underground City).
지하도시라는 명성에 걸맞게 지하로 85m, 지하 20층까지 미로 같은 길이 이어져 있다.
한 때는 2만 명 정도를 수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한다.
물론 현재까지 확인된 것이 그 정도이고 발굴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하니, 겁쟁이 글쓴이는 혹여 길을 잃을까 뒷사람의 꽁무니를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고개를 절레절레하는 파트너에게 억울하게 항변해 보지만, 잘 통하지 않는다.
“아니 진짜로 길 잃으면 못 나온다고, 진짜로.”
“응, 알았어, 알았어."
어찌 되었든 축축한 지하도시는 곳곳에 외부로부터 들어올 침입을 대비해 원형으로 된 돌문과 각종 부비트랩들을 구비해 놓고 있었다.
이곳 데린쿠유 지하도시 역시, 앞서 방문한 으흘라라계곡과 같이 한 때는 침략과 박해를 피해 도망친 누군가의 도피처로 이용된 곳이었기 때문.
수십 세기 동안 이어진 전쟁 속에서 타국의 군인들을 피해 달아난 시민들, 무슬림을 피해 달아난 기독교인들, 오스만 제국을 피해 달아난 그리스인들이 그곳을 지나갔고,
이제는 일상에 지친 현대인들이 그 피난처를 드나든다.
이 아름답고 놀라운, 그래서 더욱 슬픈 장소들이 이제는 선택과 자유에 의한 피난처로 기억되기를 바라본다.
이어지는 보석상점(터키석과 줄타나이트를 판매한다, 이곳만은 정말 물가가 비싸다.)과 터키쉬 딜라이트 선물 상점을 끝으로 한국인들로 구성된 멋진 그린투어를 마무리했다. 들르는 코스도 많지만 버스 안에서 보내는 시간도 적지 않아 힘이 많이 들기도 했던 투어였다. 하지만 터키를, 그것도 카파도키아를 여행한다면 빼놓아서는 안 되는 코스가 아닐까 싶다.(만족도 200%!)
어제저녁에도 방문했던 사랑하고 친애하는 중국집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지친 몸으로 숙소로 향한다.
어느덧 우리 여행도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