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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충작가 Jan 14. 2022

터키는 저도 처음입니다만 - 9화

오스만 투어

이스탄불의 이튿날 아침.

전날 빡빡했던 일정 덕분에 새벽 아잔 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단잠을 잔 터라 에너지가 넘친다.

숙소에 딸린 작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장 높은 층으로 이동하니 가짓수가 풍부한 아침 조식이 준비되어 있다.

짭조름한 올리브 절임, 치아바타, 그리고 과일로 배를 채운다.

창밖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인다.

‘오후에는 비가 온다는데 괜찮을는지’

작은 공간이지만 실속있었던 호텔 뷔페

시데에서의 암울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소형 우산을 챙겨 들고 길을 나선다.

밤새 누군가가 흘리고 갔을 음식 부스러기들을 주워 먹는 비둘기 떼와 잠에서 덜깬 강아지들, 부지런히 아침을 여는 이들과 아침인사를 나누며 멀리서 들리는 트램 소리를 따라 술탄 아흐메트 광장으로 걷는다.

아흐메트과장으로 가는 길

하루 전 인파로 혼잡했던 그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한적한 광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조용한 광장 한편에 내가 꼭 보고 싶었던 밀리언 스톤이 조용히 자리 잡고 있다.

홀로 오랜시간을 버텨온 밀리언 스톤

그리니치 천문대가 시간의 영점을 가져가기 전에는 세계의 시간과 거리의 표준점을 잡아주던 장소로 추정되는 곳이다.

한때는 이 기둥으로부터 하루가 시작됐고, 세계의 주요 도시들의 거리가 이 돌을 중심으로 계산됐다고 한다.

로마는 밀리언 스톤으로부터 1,691km 떨어져 있고, 아테네는 764km 떨어져 있다고 하는 식이다.

그렇게 세계의 중심에서 8,000km 멀리서 날아온 여행자들은 과거의 시간과 공간의 영점에 안부인사를 전하며 하루 일정을 시작했다.

한적한 아흐메트 광장에서 아침산책, 이집트에서 온 오벨리스크와 독일에서 온 분수대가 있다. 하나는 약탈, 다른 하나는 선물로 받은 것이지만.

 이스탄불에서 가장 유명한 투어를 꼽으라면, 비잔틴 투어와 오스만 투어가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답게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문명들이 이스탄불을 거점 삼아 흥하고 망했다.

그중 가장 거대한 두 제국이 이스탄불을 놓고 다투었던 비잔틴과 오스만이었고, 그들이 이스탄불을 나눠가졌던 시기가 이스탄불이 세계의 중심이던 시기기도 하다.

이왕이면 더 오래전 문명에 대해 알고 싶어 여행을 계획할 때부터 비잔틴 투어를 염두에 뒀었는데 일정상 울며 겨자 먹기로 오스만 투어를 선택했다.

많이 아쉬워하는 나에게 어떤 투어든 상관없다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 된다고 말해주는 그녀 덕에 마음을 풀고 투어를 즐기기로 했다.

아야 소피아 매표소 앞 벤치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투어 동료들이 하나둘씩 도착한다.

아야 소피아 앞, 아직 깊은잠에서 깨지 못한 개님


 다양한 연령대의 커플과 모녀, 홀로 여행 온 이들,  그리고 든든한 가이드님 까지 총 15명이 오스만 투어를 시작했다.

이슬람 건축의 꽃이라고 불리는 톱카프 궁전은 이스탄불(당시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오스만의 황제 메흐메트 2세가 건설했다. 이후 제국이 커나가며 증축을 개축을 거듭해 전성기에는 70만 제곱미터가 넘었다고 한다.

크기가 다른 네 개의 정원과 고풍스러운 이슬람식 건축물이 가득 찬 이 궁전에서 가장 바깥쪽인 제1 정원은 현재 터키 국민들과 여행객들을 위해 무료로 개방되어있다.

궁전은 1 정원에서 4 정원으로 들어갈수록 줄어드는 정원의 크기에 비례해 그만큼 중요한 이들이 들어갈 수 있게 설계됐다.

우리 투어는 톱카프 궁전의 상징인 평화의 문에서 시작해 2 정원의 하렘을 거쳐 3 정원의 보물관까지 이어졌다.

메흐메트2세가 새우고 슐레이만 대제가 증축한 평화의 문, 톱카프 궁전의 상징이자 2정원의 입구기도 하다
톱카프 궁전 모형과 하렘의 입구

처음 하렘이란 표현을 듣자마자, 황제의 권력과 부정의 상징 같은 곳의 명칭을 왜 그대로 살려 두었을까 싶었지만,

하렘이라는 명칭이 이슬람어로 여인들의 방을 가리키는 하람에서 왔고, 엄격한 이슬람 율법에 따라 여성들의 거처를 하람륵, 남성들의 구역은 셀람륵으로 구분한다는 것을 듣고는 조금은 편해진 마음으로 관람을 할 수 있었다. 톱카프 궁전의 하렘 역시 황후를 포함한 여성들의 거처였고, 여성들의 교육도 담당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이런 본래 뜻과 목적이 어째선지 서구사회에 전해지며 퇴폐적인 이미지화돼버린 것이다.

하렘 내부, 이미지화 된 몽환적인 장소는 아니다

하렘을 가로지르는 중앙 통로는 우리나라의 자갈돌로 된 지압로와 비슷하게 만들어져 있다. 이 길은 오직 황제만 걸어 다닐 수 있었고, 황제가 지압로에 들어서면 바닥에 늘어트려진 장식과 자갈이 만나 큰 소리가 났기 때문에 누구도 황제에게 인사하는 것을 놓치지 않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황제의 권력과 시대상을 가장 여실히 드러내 주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황제로

하렘을 지나면 3 정원으로 이어진다. 관료들을 위한 집무실과 궁정 학교의 기숙시설이 있던 이곳 한편에 톱카프 궁전의 보물관이 위치하고 있다.

3 정원을 둘러싸고 있는 회랑을 걷고 있자니 투어 시작부터 심상치 않았던 하늘이 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여행객들도 하나 둘 우산과 우비를 꺼내 쓰고 관람을 계속했지만 비에 쫄딱 맞아가며 혼비백산한 이들도 있어 우리의 과거를 떠올리게 했다.


보물관의 백미는 86캐럿짜리 거대 다이아몬드와 술탄의 칼인데, 내가 눈여겨본 것은 자그마한 나무 지팡이였다.

무려 “모세”의 지팡이다.

십자군 전쟁 때 예수살렘으로 진격하던 십자군들이 천년도 더 지난 예수의 골고다 언덕 나무십자가를 발견했다고 주장한 것과 비슷한 맥락의 유물이 아닐까.

‘홍해 바다를 갈라놓고도 수천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튼튼해 보입니다 그려.’

글을 쓰는 지금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많은 인파들과 줄을 지어 지팡이와 각종 보물들을 관람하고 나니 어느덧 오스만 투어의 절반이 지나간다.

비오는 톱카프 궁, 그리고 궁 내부에 위치한 지하 카페

 점심식사는 이스탄불에 머무는 동안 두 번이나 방문한 올드 오스만 레스토랑이다.

유쾌한 종업원들과 따듯한 주방장들이 테이블과 주방과 홀을 쉴 새 없이 드나들며 반가운 인사를 건넨다.

닭고기와 야채로 맛을 낸 케밥이 일품이고, 후식으로 내어주는 터키 커피와 디저트까지 곁들여 기분 좋게 한 끼를 해결한다.

터키 커피는 음료를 먹고 나면 고운 원두가 컵 바닥에 남아있다, 원두를 압축하거나 짜내는 방식이 아니라 원두와 함께 커피를 우려내는 터키커피 특유의 방식 때문.

오전에 갑자기 시작된 비바람은 점심을 기점으로 잦아져 가랑비로 변했지만, 뚝떨어진 기온 탓에 둘 다 트렁크 깊숙이 넣어뒀던 경량 패딩을 꺼내 입고 따듯해진 몸과 편한마음으로 오후 투어 여행지로 발걸음을 옮긴다.

돌마바흐체 궁전 바로 옆에 위치한 돌마바흐체 모스크, 궁전의 부속 건물 처럼 내부가 화려하지만 현지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기도를 드리는 작은 사원이다.

 오스만 제국의 부흥기에 만들어진 궁전 투어에 이어, 오후 투어 목적지는 오스만 제국이 점차 망국의 길로 들어서는 와중에 만들어진 궁전.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영감을 받아 지었다고 전해지는 돌마바흐체 궁전이다.

돌마바흐체의 유명한 포토스팟인데 하늘이 영..

날씨가 좋았다면 보스포루스 해협을 풍경삼아 바다와 인접한 궁전의 정원에서 한창 포토타임을 가질 법도 했겠지만,

아쉬움을 뒤로하고 묵묵히 돌마바흐체를 둘러봤다.

돌마바흐체의 외부, 톱카프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내부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어있다.)

섬세한 자리 배치가 돋보이는 이 궁전은 모든 가구와 장식의 배치가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고 있다.

입구에서 시작해 관람로를 따라가다 보면 내가 서있는 곳과 반대편에 보이는 가구가 모두 동일한 제품, 동일한 각도로 배치되어 마치 거울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온다.

하지만 대칭에 대한 신기함에서 그 멋이 그치고 만다.

톱카프에서 느꼈던 오스만 특유의 멋은 사라지고 서양의 것을 모방하는데 그쳤던 제국 후반기의 모습이 어쩌면 그 정도가 아니었을까 한다.


이집션 바자르의 상가를 지나 식사하러 가는 길

예정된 투어 일정이 모두 끝나고 우리가 방문한 곳은 이집션 바자르(므스르 차르슈)다.

유명한 그랜드 바자르만큼은 아니지만 터키의 정통 수제 과자에서 오래된 전파상, 이슬람 전통복장을 판매하는 가게 등 다양한 상점들이 깔끔한 “ㄱ” 모양의 시장에 가득하다.

자갈치 시장과 비슷한 호객중 가장 마음에 든 인사에 끌려 터키쉬 딜라이트를 구매했다.

왠지 반갑지 않은 중국어와 일본어 인사 속에 친근하게 ‘안녕하세요?’와 ‘맛있어요!’를 외치던 종업원의 노련함 덕택이었다.

구수한 터키식 홍차나 씁쓸한 터키식 커피에 더없이 어울리는 터키쉬 딜라이트는 꼭 여러 가지 맛을 보고 사보길 권한다.

물론  맛보기 딜라이트를 5개 정도 먹다 보면 더 이상 단맛을 감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지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강렬한 달달함 덕에 하루의 피로가 풀리기도 하고, 터키를 잊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저녁식사겸 다시 방문한 오스만 레스토랑, 점심에 일면식이 있던 점원이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레시피라며 내준 서비스 가지 구이는 단연 일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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