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이스탄불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여행은 인생의 축소판이라 했던가.
우리는 여행 말미에 큰 선택을 했다. 이스탄불행 저녁 비행기를 아침 첫 비행기로 변경한 것.
무려 이코노미석을 비즈니스석으로 업그레이드하는 사치를 감수하면서 말이다.
카파도키아에서 이틀을 빈틈없이 알차게 보냈기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괴레메 숙소를 나섰다. 전날 저녁 숙소 사장님께 미리 부탁을 해둔 돌무쉬를 타고 카이세리 공항으로 향하는데, 멀리서 반가운 벌룬들이 보인다. 안녕히, 카파도키아.
카이세리 공항에서는 비즈니스 항공권의 호사를 처음으로 누렸다. 체크인 대기줄을 따로 서지 않아도 되기에 VIP라운지에서 터키쉬 딜라이트를 곁들여 차를 마시고, 비행기에 올라서는 코스로 제공되는 기내식을 알차게 즐겼다. 자리 간 간격은 어찌나 넓은지, 후식 서비스는 뭐가 나오는지 등등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곧 우리의 세 번째로 목적지로의 도착을 알리는 안내 음성이 흘러나온다.
이스탄불, 터키의 심장이다.
인천공항에 내려 서울까지 꽤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이스탄불 공항에서도 이스탄불 도심까지는 꽤 거리가 있다. 우리는 무거운 짐을 고려해 택시를 타고 도시로 향하기로 했다.
공항 택시 승강장으로 들어서자 꽉 끼는 반팔 폴로티를 입은 터키 기사님이 멀리서 반가운 손짓을 보낸다. 고민 없이 그 택시로 향했다. 웃는 얼굴의 기사님이 무거운 트렁크를 가뿐히 들어 택시에 실어 주신다.
곧이어 우리나라 고속도로와 별반 다르지 않은 잘 뻗은 도로 위를 달리다 보면 산과 들판뿐이던 풍광에 어느 순간 빌딩들이 드문드문 나타나고, 왼편으로는 통통한 새장 모양의 갈라타 탑, 오른편으로는 늠름한 모스크 미나렛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 우리가 상상하던 이스탄불에 도착한 것이다.
숙소는 이스탄불의 주요 관광지를 두루 다녀 볼 수 있는 곳으로 선택했다. 그랜드 바자르와 아야 소피아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보스 술탄 아흐메트라는 이름의 호텔. 그런데 우리 목적지의 명칭을 듣고는 자신 있게 출발했던 기사님이 막상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도시를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비슷한 이름의 호텔이 워낙 많고, 관광지로 들어서자 교통이 복잡해진 탓인 듯했다. 결국 내 핸드폰으로 확인 중이던 구글 내비게이션이 위치를 네 번째로 재탐색하는 지점에서 나는 고개를 앞좌석으로 쑥 내밀어 기사님과 영혼의 소통을 시도했다. 영어와 한국어가 뒤섞인 정체불명의 언어와 제 빠른 손짓, 한껏 올라간 눈썹과 함께.
"노노, 레프트! 레프트!! 아니 왼쪽이요!!"
다행히 몇 번의 의견 충돌 끝에 제대로 된 주소에 택시가 정차했다. 땀을 흘려가며 우리를 목적지에 바래다준 기사님에게 약간의 팁을 더해 요금을 지불했다. 조금은 불편해 보였던 표정을 밝게 바꾼 기사님은 무거운 캐리어를 호텔 앞에 내려다 주곤 길을 떠났다.
호텔 지배인님의 웰컴 드링크와 컵받침 선물, 룸 업그레이드 덕에 기분 좋게 짐을 푼 우리의 첫 목적지는 이스탄불의 상징인 아야 소피아. 숙소 바로 앞에 위치한 이스탄불 고등학교에서 들려오던 학생들의 소음이 우리나라의 그것과 다를 게 없다는 이야기를 나누며 10여분 정도 술탄 아흐메트 광장 쪽으로 걷다 보니 멀리 아야 소피아가 보인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본인의 거처 옆에 작은 교회를 지어달라던 소망으로 만들어진 이 건축물은 화재와 지진 등으로 증축과 개축을 거듭하며 중세기 최대의 교회로 우뚝 섰고, 비잔틴제국이 오스만투르크에게 무릎 꿇은 이후에는 세상에서 가장 큰 모스크가 되었다가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역사박물관이 됐다. 애초 설립자의 의도가 로마제국 인민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기도와 번제를 드릴 전당을 짓는 것이었는데, 지금에 와서 각국의 수많은 관광객들이 저마다의 기도를 올리는 모습을 그가 본다면 어떤 기분일지 궁금하다.
이 기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건축물의 내부는 아이러니로 가득하다. 성모 마리아상 좌우로 무하마드와 알라의 이름이 새겨진 거대한 간판이 있는가 하면, 기독교 성화들과 모자이크들을 뒤로하고 이슬람 사제의 연단인 민 바르와 메카를 가리키는 미흐랍이 자리 잡고 있다. 방문자들은 서로가 믿는 것에 대하여 무엇이 옳고 그름을 주장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조용히 합장을 했고, 누군가는 머리를 조아리고 절을 했으며 또 누군가는 조용히 그들을 지켜봤다.
일정을 변경하여 일찍 도착한 이스탄불에서 계획대로 갈 곳은 없었고, 우리는 자유를 만끽했다.
한 손에는 아야 소피아 앞에서 구입한 마약 옥수수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둘의 손을 꼭 붙잡고 유명한 광장을 걷다 보니 안탈리아와 카파도키아와는 사뭇 다른 유명 관광지의 풍경이 새롭고 반갑다.
점심은 이스탄불의 여러 한식당 중 보스포루스 해협이 내다보이는 곳을 골랐다. 냄새만으로 이미 합격이었던 라면과 제육볶음은 순식간에 해치웠지만 향에 익숙지 않았던 양고기 만두는 소화하기 쉽지 않았고, 터키에서 물가가 제일 높은 도시에 온 것이 실감 나는 가격표 역시 쉽게 소화되지 않았더랬다.
아야 소피아 뒤편과 톱카프 궁전 사이에 차가 다니지 않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샛길이 하나 있다.
그 유명한 3중 성벽은 아니더래도 꽤나 견고하고 높게 새워진 톱카프 궁전의 벽면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체 한편에 서있고, 다른 한편엔 아야 소피아의 웅장한 벽 아래로 초록빛 상록수와 작은 상점, 노점들이 문을 열고 있다. 오후의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세상에서 가장 바쁘고 가장 아름다운 도시를 목적 없이 걷는다. 우리보다 한가해 보이는 이들은 그늘을 찾아 쉬고 있는 개와 고양이들 뿐이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며 걸으며 오늘 유람선을 타보자고 의기투합했던 우리였지만, 이스탄불의 명물 돈두르마를 그냥 지나치치는 못했다. 연신 기다란 주걱을 흔들어대는 아이스크림 가게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와, 아이스크림을 낚아채려는 우리들을 여유 있게 따돌리는 손놀림, 길가에 울려 퍼지던 우리 둘의 웃음소리, 그리고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한 종소리가 더해져 관광지의 유쾌한 오후에 녹아든다.
모 TV 프로그램에서 이스탄불 여행 시 갈라타 다리 아래에서 먹는 고등어 케밥을 홍보한 적이 있다. 직화 고등어에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하고 두꺼운 빵에 겹쳐먹는 샌드위치라니, 고등어 백반에 익숙한 우리들에게는 익숙지 않으면서도 호기심이 생기는 음식이라고 생각하곤 채널을 돌렸었는데, 길을 걷다 문뜩 직화 고등어구이 냄새를 맡고는 그때 TV에서 나오던 갈라타 다리와 케밥 상점들이 있는 에미뇌뉘 선착장에 도착한 것을 알았다.
오스만투르크의 메메트 2세는 비잔틴제국을 손에 넣기 위해 난공불락의 콘스탄티노플을 육지와 바다에서 에워쌓다. 그리스 땅과 이어지는 3중 성벽은 거대한 대포로, 옛 소아시아 지역으로 통하는 보스포루스 해협은 전함으로 통제했다. 이에 대응해 콘스탄티노플의 지도자들은 지금의 갈라타 다리가 있는 위치 언저리에서 건너편 해안까지 거대한 쇠사슬을 설치해 만을 봉쇄했다. 금각만(골든혼)으로 불렸던 작은 만의 입구를 막으면 만 하류와 이어져있는 보스포루스 해협과 육지 쪽이 봉쇄된다고 해도 만 상류를 통해 원군과 물자를 수송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술탄 매매트 2세는 쇠사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거대한 통나무를 바퀴로 활용해 배를 육지로 들어 올려 만 안에 풀어놓아 결국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켜버렸다. 그 쇠사슬은 지금 이스탄불 군사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 다행히 현재의 골든혼 위에는 투박한 쇠사슬 대신 아름다운 다리들이 놓여있고 통나무의 도움 없이도 수백 척의 배가 평화롭게 지나다닌다.
익숙한 고등어 향과, 사람들로 가득 찬 선착장, 그리고 떼 지어 울어대는 갈매기들 덕분에 여기가 이스탄불인지 포항 앞바다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에미뇌뉘 선착장은 갈라타 다리를 중심으로 양쪽(그리고 양안)으로 길게 늘어서 있다. 선착장에서는 보스포루스 해협과 마르마라 해, 골든혼을 오가는 유람선들이 즐비하다.
우리는 중간 정도 되는 크기의 유람선에 몸을 실었다. 곧이어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유람선이 바다로 나아간다. 우리가 선택한 유람선의 항로는 흑해 방면의 좁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거슬러올라 보스포루스 대교와 메메트교를 보고 다시 에미뇌뉘 선착장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럼, 힘차게 출발!
해가 질 즈음 출발한 유람선은 한 시간 가량 보스포루스 해협 양안을 두루 둘러보고 이스탄불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배 위에서 마주한 이스탄불은 오후의 햇살 대신 주홍빛 할로겐 불빛으로 빛나고 있었는데, 차갑게 빛나는 LED 빛보다는 노랗게 빛나는 할로겐 등의 따스함이 이 유구하고 사연 많은 도시에 더 어울린단 생각이 든다.
급하게 이스탄불로 날아왔던 우리의 선택은 이렇게 대성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