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터키
시원한 하늘의 이스탄불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
일정상 체크아웃 시간이 지나 돌아올 계획이라 짐을 맡아줄 수 없는지 호텔에 문의했더니 고맙게도 걱정하지 말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홀가분해진 마음과 달리 무겁게 채운 조식 뷔페 접시를 비우곤 하루를 준비한다.
아직 둘러보지 못한 관광지와 식당, 카페들이 많지만 욕심을 버리고 느긋하게 이스탄불을 즐기러 출발.
구글 지도를 믿고 이스탄불의 소란스러운 아침을 가로질러 쉴레이마니예 모스크로 향한다.
이스탄불에서 가장 오래된 모스크가 하기아 소피아고, 가장 유명한 모스크가 블루모스크라면,
쉴레이마니예 모스크는 이스탄불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스크라고 할 수 있다.
하루 전 오스만 투어 때는 보지 못했던 맑은 하늘과, 길목에서 여행객들을 반기는 아기 고양이들을 지나쳐 걸어가니 미나렛이 보인다.
숙소가 있던 이스탄불 구시가지와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지나온 여행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금방이다.
모스크 주변은 하얀 대리석 사원과 초록색 정원, 그리고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이른 시간부터 붐빈다.
우리 같은 여행객들, 결혼식 스냅사진을 찍으러 온 부부, 참새들이 저마다의 목적을 위해 부산히 걸어 다닌다.
우리도 질세라 열심히 사원 안팎을 돌아다니며 경치에 감탄하고 사진을 남긴다.
모스크 주변엔 루프탑 카페들이 많다.
골든혼과 보스포루스 해협, 마르마라 해가 한눈에 보이고 멀리 갈라타 탑도 보이는 뷰 맛집이기 때문.
밤새 내린 비덕에 루프탑 쿠션들이 축축했지만 용케도 젖지 않은 쿠션을 찾아 자리를 잡고는 따듯한 차이를 주문했다.
놀랍게도 이곳에서도 음식을 손에 들고 하늘을 향해 들고 있으면 거뭇거뭇한 이스탄불 비둘기가 먹이를 낚아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겁쟁이인 나는 작은 과자를 들고 유인하는 시늉만 했는데, 반복 학습 탓인지 눈치 빠른 갈매기가 내 손을 향해 날아왔다.
기함하는 나를 보고 그녀는 진심을 다해 웃으며 소리를 지른다.
바람 부는 루프탑 카페에서 본 이스탄불은 이틀 전 보스포루스 해협을 거슬러 올라가던 작은 정기선에 봤던 이스탄불의 야경과는 또 다르게 다가왔다.
천년 동안 세계의 수도였던 도시는 여전히 그 자랑스러운 시절을 잊지 않고 있는 듯하다.
쉴레이마니예 모스크에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이스탄불 관광객들의 필수 방문코스가 있다.
바로 그랜드 바자르다.
각종 차 종류, 터키쉬 딜라이트같이 터키를 대표하는 관광 선물집부터 전자상가, 옷집, 찻집, 장신구점, 향신료점, 카펫 가게 등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시장이다.
현대화된 지하상가와 낡은 대형 도매시장의 매력을 모두 가진 그랜드 바자르는 독특한 돔 형태의 지붕을 머리에 이고 관광객들을 맞이한다.
입구에 들어섬과 동시에 양편 식료품점에서 동양권 언어를 한 되 섞은 호객행위가 이어지지만,
하루 전 이집션 바자르에서 경험한 탓인지 그리 놀라지 않고 군중에 섞여 든다.
이집션 바자르가 'ㄱ'모양의 간단한 구조로 직진으로 걷기만 하면 바자르의 처음과 끝을 모두 경험할 수 있는데 반해,
그랜드 바자르는 주요 입구 4개를 포함하여 20여 개의 작은 입구들이 있어 시장 곳곳을 모두 둘 어보는 것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시장을 구경한다.
그랜드 바자르를 그대로 통과해 조금 걸으니 트램이 다니는 큰길이다.
오전 내 걸어 지친 몸에 맛있는 군옥수수를 넣어 응급처치를 하고, 길가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한다.
트램이 코너를 돌며 내는 종소리와 멀리서 손님을 찾아 헤매는 돈두루마 주인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톱카프 궁전에서 에미눼니 선착장으로 향하던 바빴던 이스탄불 첫날이 다시 생각났다.
바람처럼 지나간 3일이 야속하지만, 어떤 장소에서도 맛난 먹거리를 즐기고 여행지의 분위기를 있는 그대로 즐길 줄 아는 그녀 덕에 웃음 짓는다.
멀리 보이는 블루모스크는 여전히 내외관을 보수 중이라 가보지 않고, 메두사의 머리로 유명한 예레바탄 사라이를 마지막 목적지로 삼아 걸어본다.
예레바탄 사라이(Yerebatan Sarnıcı: 지하 궁전)는 트램과 사람들로 혼잡한 술탄 아흐메트 광장의 한편에 위치하고 있다.
유명한 관광지의 입구로는 안 보이는 1층 석조 건물 앞에 사람들이 줄지어 서있는 것이 보이면 재빨리 줄을 따라서야 한다.
다행히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길게 기다리지 않아도 지하궁전에 들어갈 수 있었다.
댄 브라운의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인페르노’에서 묘사한 예레바탄 사라이의 멋진 장면을 머리에 새기고 지하세계로 한 발 한 발 들어갈 때마다 기분이 새롭다.
톰 행크스가 출연하는 영화에서처럼 멋진 클래식 공연이 벌어지진 않지만,
그 축축한 공기 속에서 서로 다른 기둥들이 떠받치고 있는 이스탄불의 지하세계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한때는 이스탄불의 비상 물 저장고였던 이곳에서, 관광객들은 원래 목적대로였으면 볼 수 없었을 기둥들의 서로 다른 독특한 장식과 문양에 대해 소개받고 사진을 찍는다.
주황색 할로겐등 아래 드러난 독특한 석조 장식들과, 관광객들의 낮게 울려 퍼지는 소음, 그리고 묵묵한 기둥의 성실함은 이제 예레바탄 사라이의 또 다른 정체성이 되어버렸다.
오랜 시간 조용하고 축축하기만 한 삶을 살았을 그 공간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지하궁전을 찾아오는 각양각색의 관광객들이 반가울지도 모르겠다.
오전 내 우리 짐을 맡아준 숙소 지배인님에게 감사인사를 전하고 무거운 트렁크를 챙겨 공항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마약 옥수수로 잠시 응급처치를 해둔 위장이 비상신호를 보내는 턱에 하기아 소피아 인근의 붐비는 식당으로 급히 피신했다.
여태껏 터키에서 먹은 양고기 음식들 중 가장 냄새가 강한 스테이크가 나온 탓에 그녀는 함께 나온 빵들로 배를 채우고, 나는 꿋꿋이 접시를 비웠다.
하기아 소피아 한편에 있는 정류장에는 여행을 시작하는지 끝내는지 모를 인파들이 줄지어 버스를 기다리는 중이다.
마지막 날이지만 마음이 아쉽지만은 않은 것이 행복한 하루를 보낸 탓인지, 완벽한 9박 10일을 보낸 탓인지,
그것도 아니면 기내식으로 한국음식을 먹을 기대가 되어서인진 모르겠지만 기쁜 마음으로 이스탄불과 터키에 작별인사를 보낸다.
“굿바이 터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