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클로버 퀸 (1/6)
쓰나미가 동해안을 덮쳤다. 일본 서해안의 해저에서 발생한 지진의 여파였다. 그때 나는 분당의 한 요양병원에 있었다. 내 앞에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놓였고 창틀에 갇힌 하늘은 그날따라 드물게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했으며 바야흐로 봄이 무르익어 벚꽃이 지천이었다. TV에서는 계속해서 뉴스 속보가 흘러나왔지만 나를 흔드는 것은 지진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가끔 깜빡하던 정도가 아침저녁으로 잦아지더니 하루가 이틀이 되고 급기야는 며칠로 늘었다. 나를 의사 선생이라 부르고 간호사로 여겼다. 처음 듣는 이름으로 부른 적도 있었다.
아래로 배다른 형제가 셋이다. 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은 십 년 전쯤 두 아들을 데리고 호주로 이민을 갔고, 세 번째 부인은 두 번째 부인과 살 때 가정부로 일한 필리핀 여자인데 남자아이 하나를 낳았다. 한 번은 자식뻘인 꼬맹이의 이름으로 나를 부르기도 했다.
그러니까 쓰나미가 동해안을 덮쳤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버지가 내 이름을 부른 것은 충분히 깜짝 놀랄 만한 일이었다.
“쓰나미가 왔대요.”
TV 화면은 부서진 어선과 무너진 집 들이 파도에 휩쓸려 속절없이 떠내려가는 장면을 계속해서 보여주었다. 지옥으로 끌려 들어가는 세상을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그에 비하면 병실은 천국이었다. 병원에서는 모든 것이 삶의 재건을 위해 복무한다. 배를 가르는 칼과 손등을 찌르는 바늘 하나까지도.
“어젯밤에 네 엄마 왔다 갔다.”
처음엔 무슨 소린가 했다. 나의 엄마라면 나를 낳은 엄마, 즉 아버지의 첫 번째 부인일 텐데, 그들은 내가 걸음마를 떼기도 전에 이혼했다. 나에게 그녀는 그냥 모르는 사람이었다.
나는 할머니를 엄마로 여기고 자랐다. 애연가인 할머니는 나를 업은 채로 담배를 피우기 일쑤였고 결국은 내 손등에 담뱃재 흉터를 남겼다. 생애 최초의 기억이다. 푸른색 대문 너머로 어렴풋이 떠오르는 얼굴이 있기는 하나 그녀가 나의 엄마인지는 확실치 않다.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은데다 아무도 그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내가 아홉 살 때 두 번째 부인과 결혼했다. 울산에 회사가 있었고 바다가 보이는 백 평대 아파트를 구입해 따로 살림을 차렸다. 하지만 나를 데려가지는 않았다. 할머니는 내가 중학교를 졸업한 겨울에 폐암으로 세상을 떴다. 그때부터는 아버지의 유일한 혈육인 고모와 둘이 살았다. 무역회사를 다닌 고모는 내가 대학에 들어간 해에 주재원과 결혼해 네덜란드로 건너갔고 지금은 헤이그에서 민박집을 운영한다. 나는 스무 살이 되자마자 내 뜻과는 무관하게 독립을 당했다.
그런데 영원히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 같았던 아버지가 나를 알아보더니 평생 존재한 적 없는 나의 생모를 만났다는 것이다.
“무슨 비행기 조종사처럼 큼지막한 고글을 얹은 군밤장수모자에, 가죽점퍼에, 건빵바지를 입고 나타나서는, 어제 헤어진 사람처럼, 잘 지내고 있지? 하는 거야. 여전하더구만. 누군지 한눈에 알아봤지. 이게 어딜 봐서 잘 지내는 거냐고. 국은 맹탕이지, 반찬은 간이 하나도 안 됐지.”
나는 환자식을 아버지 앞으로 옮기려다 멈칫했다.
“봐라, 이게 죄수복이 아니고 뭐냐. 바람은 숭숭 들어오지. 저쪽 침대는 또 비었어. 무슨 대합실도 아니고, 저승으로 떠날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어딜 봐서 잘 지내냐는 소리가 나오느냐고.”
말을 멈춘 아버지는 녹슨 기계처럼 삐거덕삐거덕 고개를 돌렸다. 벚꽃이 눈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지진해일은 자연재해지만 날씨와는 무관했다.
“세계 여행 중이라더라. 자기가 직접 비행기를 몰고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날아다닌다는 거야. 만날 답답해 죽겠다고 노래를 부르더니만, 아주 살판이 난 게지. 그래도 얘길 듣다 보니 덩달아 마음이 비행기처럼 붕 뜨는 것이, 예전과는 다르게 귀를 기울이게 되더구나. 얼마 전까진 남태평양에 있는 고래처럼 생긴 무인도에 있었대. 섬을 탐험하다 조난당한 마술사 부부를 만났는데 한 일 년쯤 같이 지냈다더군.”
그러고는 마치 비행기의 궤적을 뒤좇듯 텅 빈 하늘에 하염없이 시선을 두고 있다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어, 간호사 양반. 똥이 나온 것 같은데, 냄새나지 않아? 한번 봐봐.”
기억에 없으면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엄마는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누군가 기억하는 한 죽었어도 산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아버지처럼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뿐인 세상에서 홀로 늙어가는 나를 상상했다. 나를 아는 사람이 모두 사라지고 나를 모르는 사람들만 남은 세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