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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라거나 넘치거나

모지리, 상모지리 이야기

by 강윤희

손목을 젖힐 수가 없었다.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가 계단에서 넘어졌다. 잘 넘어지는 편이라 주로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데 그날따라 5cm 굽이 있는 구두를 신었다. 구두굽이 맨 밑바닥 계단참에 걸렸다. 설날 세배하듯 앞으로 꼬꾸라졌다. 무게가 실려서 세게 땅을 짚었는지 다음날부터 손목 쓰기가 힘들었다.

잘 넘어지는 것도 넘어지는 거지만 건망증도 심하다. 지하 주차장에 내려와서야 자동차 키를 안 가지고 온 걸 깨닫는다. 차키를 가지러 올라가서 핸드폰을 두고 온다. 다시 올라가서 핸드폰을 어디에 뒀는지 찾는다. 이런 게 일상이다. 이젠 차키를 아예 차에 두고 다닌다. 만나기로 한 약속도 자주 까먹어서 급박하게 가기가 일쑤다. 그러다 보니 약속 시간에 지각이 잦았다.

친구들은 카페에서 주문한 커피를 받아오는 일도 내게 시키지 않는다. 가지고 오다가 엎을 것 같다는 것이다. 테이블 위에 커피 잔도 꼭 모서리에 놓는다며 사고 치는 이유는 다 있다면서 커피 잔을 앞으로 당겨 놓아준다. 손이 가도 많이 가는 애라고 핀잔이 한 바가지다. 주소를 적어 넣는 일이나 전화번호를 입력하는 일에서도 숫자를 앞 뒤 순서 바꿔 입력하고, 글자도 자주 틀린다. 그냥 난 조심성 없고 둔한 사람이라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그렇게 둔하고 예민 하지 못한 나에게 제일 힘든 일로 다가오는 스트레스가 있다. 처음으로 다가오는 남편의 기일이다. 제사상을 차리는 일도 일이지만 시댁식구들이 찾아온다고 생각하니 내 둔한 신경이 날카롭게 변한다. 기일이 다가올수록 주변에 짜증을 부렸다. 남편의 부재를 안 느끼려고 노력하는데 기일이 다가올수록 남편이 내 곁에 없다는 현실이 와닿았다. 남편무덤도 못 가는 내가 제사상에 사진을 올려놓고 절을 하고 손님들을 치러야 하니 도망가고 싶었다. 배 째라 하고 기일 날 사라져 버릴까...

남들은 별 걸 가지고 다 스트레스받는다고 했지만 제삿날이 다가오는 하루하루가 버거웠다. 결국은 정신과를 찾았다. 실수가 잦은 것과 잘 넘어지는 것, 건망증이 심한 것 등을 설명하고 제사에 대한 스트레스를 얘기했더니 여러 가지 검사를 했다. 모니터를 앞에 두고 같은 모양이 나오면 스페이스바를 누르라고 했다. 모니터 속 화면에서 삐- 삐- 소리가 났다. 세 살도 할 것 같은 도형 테스트를 했다. 지루해서 뛰쳐나가고 싶었다. 집중력 테스트인가 싶어 꾹 참고 스페이스바를 누르며 최선을 다했다. 이것 말고도 다른 것들도 많았다. 순서대로 나오는 도형들의 규칙을 찾는 것이나 단어 기억력 테스트 등 여러 가지 종류가 다양했다. 4시간에 걸쳐 검사를 받았다. 검사받다가 정신병이 생길 것 같을 정도였다. 결과는 한 달 뒤에 나온다고 했다.

검사 결과는 우울증과 ADHD였다. 어릴 때도 ADHD경향이 있었지만 지능이 높아서 알아차리기 힘들었을 거라는 A4용지 10장 정도 되는 검사결과를 받았다.

“ 내 지능이 높다고 으잉? 지능이 높아?”


“우울증이랑 ADHD결과를 받았는데 지능이 높데. 지능이 높아서 몰랐을 거래.”

활짝 웃으면서 지능이 높다는 부분을 몇 번씩이나 강조하며 친구에게 설명했다.

“지능이 모자라면 모자라지 넘치진 않을걸. 너 우울증과 ADHD는 머릿속에 안 들어오지? 지능얘기만 귀에 들어온 거지?”

난 고개를 크게 위아래로 여러 번 끄덕였다.

“흐흐흐, 나 지능이 높대. 나 똑똑했나 봐!”

“내가 보기엔 병원이 돌팔이네. 돌팔이야. 이렇게 마냥 행복한 애를 쯧쯧...”

친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게 미소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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