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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필요해

by 강윤희

삐 삑 삐 삑 비비 삑. 도어록 숫자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현관 센서 등이 밝아졌다. 신발을 툭툭 벗어서 거실로 들어갔다. 하얀색 스위치를 순서대로 누르면서 집안 불을 밝혔다. 손에 든 가방을 소파에 던지고 몸도 같이 기댔다. 조용한 분위기가 싫어서 보지도 않을 텔레비전을 켰다. 거실에 앉아 있다 보니 천장 조명이 이상했다. 거실 샹들리에 전구 한 개가 수명이 다했는지 끊임없이 깜빡거렸다. 거실에 앉아 책을 읽는데, 깜빡거리는 게 성가셨다. 책을 덮고 안방으로 갔다. 침대에 앉아 다시 책을 펼쳤다. 침대에 앉아 읽으려니 잠만 온다. 오늘도 책은 내일 몫으로 넘어갔다.


아침을 먹은 후, 설거지를 했다. 행주로 싱크대 주변을 닦는데 자꾸 물기가 고였다. 싱크대 수전에서 새는 물이다. 싱크대 주변이 마를 날이 없었다. 조금씩 새어 나오는 물이 신경 쓰였지만 귀찮았다. 주변으로 넘치지는 않으니 행주로 그냥 덮어놨다.

소파에 앉아 집안을 둘러봤다. 집안 벽에 뭐가 묻기도 많이 묻었다. 새로 페인트를 칠해야 했다. 벽에 페인트를 칠하려면 가구를 다 옮겨야 해서 혼자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여기저기 손이 가야 할 일만 눈에 보였다. 모든 게 귀찮았다. 그냥저냥 지냈다.


애들이 육지에서 공부하다가 방학을 맞아 제주로 왔다. 아이들은 오랜만에 오는 집이라 무척 반가워했다. 그 반가운 집이 예전 같지 않았다. 전등은 깜빡거리고, 싱크대는 물이 흥건했다. 애들 방 벽에는 아직도 뽀로로 스티커가 붙어 있다. 아주 큰 수박 만한 스티커들이 색이 다 바랜 채 여기저기 붙어 있다. 남편이 없으니 깔끔하던 집이 빨리 늙어갔다.


전등이 깜박거리는 거실에 앉아 있으려니 큰애가 전등 안 바꿀 거냐고 자꾸 물어본다. 바꿀 거라고 대답했지만 전구도 사러 가야 하고 사다리도 챙겨야 해서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다. 큰애가 자꾸 재촉했다.

“전등 좀 갈아”

“알았어.”

“또, 대답만 한다.”

“서방이 없어서 그래”

“마흔 넘으면 혼자 할 줄 알아야지. 엄마, 애기야?”

“칫!”

뭐 도와주는 거 없으면서 잔소리는 많다.

남편이 없어서 불편한 건 집안 손보는 것만이 아니다. 제일 불편한 건 등이 간지러울 때다. 효자손을 사용하지만 사람 손만 한 게 없다. 시원함이 다르다. 남편이 내 등을 긁어줄 때는 등에 대동여지도를 대입해서 긁는다. 경상도! 하면 오른쪽 아래. 제주도! 하면 왼쪽 맨 아래. 아오지탄광! 하면 오른쪽 맨 위. 간지러운 곳을 어떻게 아는지 딱딱 맞혀서 긁어줬다. 큰애에게 등 좀 긁어달라고 했다.

“안돼. 싫어. 손톱에 때 낄 것 같아”

“좀 끼면 어떠냐? 유난은”

“효자손 사용해!”

“난 불효자손이 더 좋아. 너 그 불효자 손으로 좀 긁어줘”

큰 애가 등을 긁어주는데 남편만 하지 않다. 역시 남편 손이 최고였는데...


큰애가 도와줘서 샹들리에 전구를 갈았다. 싱크대 수전도 고쳤다. 페인트는 아직 칠하지 못했다. 하나씩 하나씩 남편 없는 대신 불효자 손을 빌려 고쳐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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