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한 살에 남편과 연애 시작하고 스물다섯 살에 결혼했다. 소꿉장난 같은 결혼생활이었다. 세탁기 돌리는 법도, 양말 개는 법도 몰랐다. 건조대에 빨래를 널어놓고 마르면 건져 입었다. 남편의 면바지는 항상 구겨져 있었다. 셔츠의 옷깃은 앞으로 말려 올라왔다. 요리는 할 줄 몰라서 주로 외식이었다. 살림 능력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친정엄마 아빠가 가끔 올 때마다 청소를 해주고 갔다. 철딱서니 없는 딸이 민망하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했을 것이다. 지금 내 큰딸 나이가 이제 스무 살인데 학생티도 안 벗은 애다. 그런 어린아이가 연애를 하고 결혼했으니 얼마나 막막했을지 우리 부모님 심정이 이해가 간다.
시어머니는 부산에 사는 관계로 제주도에서의 시댁은 신랑의 큰아버지 댁이었다.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의 첫째 딸이 우리 엄마 나이와 비슷했다. 엄마와 나이가 비슷한 큰 시누이의 딸이 나보다 한 살이 더 많았다. 내게 숙모라고 부르는 한 살 많은 언니였다. 나이 차가 많아 더욱 시댁에서는 햇병아리 조카며느리였다. 햇병아리가 결혼하고 첫 명절에 한복을 입고 심부름을 하다가 문지방 위에서 치마를 밟고 뒤로 넘어졌다. 그 많은 친척 앞에서 치마가 뒤집히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눈물이 찔끔 나고 무안했지만 빠르게 일어나서 헤헤거리며 웃었다. 어른들 표정이 웃음 참기 대회였다. 조신해도 모자랄 새댁이 발라당 넘어지며 명절날 신고식을 했다.
결혼 생활 일 년이 지난 즈음 큰어머니가 우리 부부를 불렀다. 다음 해부터는 제사를 직접 지내보라고 권유하셨다. 말이 권유지 간곡한 부탁이셨다. 시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남편은 너무 어렸기 때문에 큰어머니가 대신 제사를 일 년에 10번 정도 지냈다. 그걸 30년간 해오셨다. 큰어머니는 할아버지 할머니 제사를 지내고, 내가 다음 해부터 시아버지, 증조모, 증조부 제사를 차리기로 했다. 설, 추석까지 합하면 일 년에 다섯 번 정도 제사상을 차려야 했다.
“재미있을 것 같아요! 저 잘할 수 있어요!”
내가 한 첫 대답이었다. 남편은 그 작은 두 눈이 동그래지더니 나와 큰어머니를 번갈아 쳐다봤다. 난 시댁 어른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에 대차게 대답했다!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는 요리를 잘 못해도 괜찮다고 했다. 귀신같이 안다는 말이 무슨 말이겠냐며 정성만 있으면 조상은 다 안다고 했다. 손주며느리가 차리는 제사상은 조상님이 다 좋아할 거라 격려했다.
다음 해에 첫제사상을 본 큰어머니는 잘 익지도 않은 쇠고기적을 뒤집었다. 삐뚤삐뚤 동그란 건지 네모난 건지 세모인 건지 모를 전을 보고도 웃기만 하고 잘했다고 칭찬해줬다. 그 칭찬에 어깨가 솟아올라서 그다음 해도 그 다음다음 해도 힘든 줄 모르고 제사상을 차렸다. 제삿날마다 남편도 전을 부치고, 적을 익히고, 나물을 무쳤다. 오히려 남편이 힘들다고 음식 좀 줄이자고 했다. 여러 해가 지나서는 남편이 제사상을 상차림 가게에 맡기면 어떠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그렇게 일 년에 다섯 번. 20년간 제사를 지냈다.
20년 정도 세월이 지나면서 시아버지 제사는 아주버니가 지내게 되고, 증조모 증조부 제사는 지제를 하게 되면서 지내야 할 제사가 없어졌다. 남편은 축하한다면서 이제는 제사 졸업이라고 해줬다. 그동안 고생했다고 머리를 쓰담쓰담해줬다.
2년 후 내가 남편 제사상을 차릴 거라고 생각도 못 했다. 제사 졸업, 이제 끝이라며 축하해 줬던 남편이 본인 제사를 남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