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전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 결혼을 앞두고 궁합을 보러 갔었다. 사주팔자, 궁합 이런 거 믿지 않았었다. 마침 친한 동생의 어머니가 무속인이었다. 어린 나이에 호기심 반으로 진심 반으로 찾아갔다. 결혼을 앞두고 엄마가 철학관에서 궁합을 보고 왔는데 궁합이 안 맞다며 걱정한 말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무속인은 남편 될 사람이 나의 모든 것을 맞춰주고 살 거라고 걱정 말라고 했다. 내 팔자는 이런 무당집 찾아올 정도로 굴곡 있는 삶이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도 했다. 그리고 40대에 큰돈이 생기니 돈 걱정도 하지 말라고 했다. 엄마가 말한 궁합은 신경 쓰이지 않았고 믿지도 않았다. 하지만 무속인에게 좋은 말을 들으니 이 말은 다 믿고 싶어졌다. 궁합이 이러쿵저러쿵 말도 많았지만 철없던 우리는 스물다섯, 스물여덟이라는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해도 달라진 건 없었다. 여전히 연애하듯 지냈다. 시댁이 생기고 처가가 있는 삶으로 바뀌었지만 우리는 우리대로 살았다.
결혼 6년 차에 아이를 가졌다. 처음에는 아이는 안 가질 생각이었다. 남편이랑 나랑은 친구처럼, 남매처럼 지냈고 둘만 있어도 재밌었다. 무엇보다도 자유로웠다.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했고 집에 안 들어올 정도로 놀기도 했다. 그러다 우연히 산부인과 검진을 받게 됐다. 자궁에 혹이 생겼다며 나중에 임신을 못 할 수도 있다고 했다. 아이를 안 가지는 것과 못 가지는 건 큰 차이였다. 고민 끝에 아이를 낳자고 했다. 1년 만에 큰애를 얻었고 15개월 차이 연년생으로 둘째를 얻었다. 아이들을 부를 때 ‘내 선물들’ 이라고 불렀다. 남편은 이럴 줄 알았으면 일찍 아이를 낳을 걸 하면서 딸 바보가 되어갔다. 아이들 목욕도 남편이 시켰다. 기저귀 가는 것도, 밤중 분유 수유도 남편이 다 도맡아 했다. 큰딸은 날 닮았고, 둘째는 아빠를 닮았다. 우리는 서로, 자기를 닮은 딸과 사랑하는 사람을 닮은 딸을 가지게 돼서 행복하다는 말을 아이들에게 자주 했다.
궁합을 보던 그 무속인은 정확히 반만 맞혔다 굴곡진 인생이 23년간 없었다. 큰 마음고생도 없었다. 경제적으로도 모자라지 않았다. 아이들은 속 한번 썩이지 않았고, 부부싸움조차 거의 없었다. 고부갈등은 좀 있었으나 그것마저 남편과 사이가 더 좋아지는 계기가 될 뿐 문제되지 않았다. 앞으로 이렇게 산다면 인생 살만 했다. 일찍 결혼해서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다는데 난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재작년까지는.
코로나가 유행하면서 내 인생은 뒤집어졌다. IMF 때도 안 흔들리던 남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가게는 기울어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거리두기는 모든 요식업 업소를 힘들게 했다. 남편은 스트레스가 심해서인지 잘 알지도 못하는 희귀암에 걸렸다. 횡문근육종암. 10만 명중 1명이 걸린다는 암이었다. 처음에는 암인 줄도 몰랐다. 의사는 그냥 혈종이나 지방종이니 제거하면 된다고 걱정 말라고 했다. 왼쪽 등 날개뼈 근처에 있는 흔한 멍울이라고 생각했다. 가볍게 생각하고 수술한 게 문제였다. 희귀암이라 다뤄 본 의사도 별로 없었고, 치명적으로 육종암은 치료약도 없었다. 조그마한 종양이 우리 삶을 헤집어 놨다.
2022년 한여름에 투병생활을 시작했다. 10센티 정도의 암 덩어리만 제거하면 끝날 줄 알았다. 폐전이가 되고, 뇌까지 전이가 되면서 그 다음해 봄이 왔을 때 남편은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보며 벚꽃 축제에 가자는 마지막 말과 선물 같은 두 딸을 남기고 떠났다.
슬퍼할 겨를조차 없었다. 장례식은 정신없이 치러졌고 손님을 치르느라 애도할 틈도 없었다. 애들은 눈물도 없이 멍하니 허공만 바라봤다. 내가 살아야 했다. 두 사람이 해야 할 몫을 혼자 해야 했다. 가게도, 애들도 다 내 손을 거쳐야 했다. 남들은 내가 강해서 버틴다고 하지만 우울증 약으로 버티고 있었다. 약에 의지해서라도 살아내고 싶었다. 살아서 내가 잘 지내고 있는 걸 보여줘야 했다. 그래야 애들도 산다. 어떻게든 우리는 살아야 했다.
‘폭삭, 속아수다’ 드라마를 남들은 다 봤다고 하는데 나는 중간부터 볼 수 없었다. 주인공의 아빠가 암 투병을 하는 장면부터 TV를 껐다. 이것뿐만 아니라 누가 병으로 죽거나 하는 내용의 드라마는 못 보고 있다. 볼 수가 없다. 남편의 무덤에도 가지 않았다. 애들도 가기 싫어했다. 남편의 부재가 느껴지면 견딜 수가 없었다. 남편이 그리워지는 순간이 올 때면 유튜브를 봤다. 바보 같은 코메디를 보면서 머릿속에서 남편 생각을 지워냈다. 내가 버티는 방법이었다.
남편이 사망하고 1년쯤 지난 어느 날, 남편이 쓰던 통신사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사망한 사람의 명의를 핸드폰에 쓸 수 없다는 설명이었다. 내 명의로 핸드폰을 바꾸려고 남편의 폰을 뒤적거렸다. 전화번호부와 주소록을 옮겨야 했다. 사진도 옮기려고 살펴봤다. 남편의 핸드폰 사진 속에 사진은 다 내 사진이었다. 병실에 쪼그려 앉은 모습, 보호자 침대에 등 돌려 누운 모습, 벚꽃을 바라보며 창밖을 보는 내 뒷모습, 잠잘 때 코 고는 소리까지 동영상에 저장이 되어 있었다. 하나같이 내 모습이었다. 내 모습이 찍힌 사진을 하나하나 넘기다가 터지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