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포로에서 먹는 카이센동
계획 없이 떠나온 여행은 장점이 많다.
무얼 해야 한다는 속박도 없고,
빨리 가야 한다는 촉박도 없다.
모두가 부지런히 여행을 시작하느라 아침부터 부산스러운 캡슐 호텔.
그 부산스러움을 뒤로한 채 10시에 느지막이 일어나 지하 1층에 있는 대욕탕에 간다.
따뜻한 물에 20분 동안 몸을 담그고 머리를, 눈알도 이리저리 굴려본다.
'무얼 먹을까. 무얼 먹어야 이 하루가 더 맛있어질까.'
그때 파칫- 하고 '카이센동'이 스쳐 지나간다.
카이센동이 떠오른 이상 목욕에 집중하기 힘들다.
어제저녁 먹은 수프 카레의 염분 탓에 땡땡 부어있던 얼굴도
마침 부기가 빠져 원상태로 돌아왔다.
후다닥 옷을 꿰어 입고 구글 맵 하나만 믿은 채 호텔을 나선다.
뜨거운 증기에 이완되어 있던 모공 사이사이로 스며드는 삿포로의 찬 바람.
그 찬 바람이 온전히 느껴진다. 기분 좋게 개운하다.
그 길로 도착한 곳은 장외시장의 한 카이센동 식당.
점심시간이라 부르기엔 살짝 이른 11시 15분쯤이라 그런지 다행히 웨이팅은 없다.
받아 든 메뉴판에는 수많은 카이센동이 빼곡하다.
어떤 해물이 어떤 조합으로 들어갔는지에 따라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이렇게 선택지가 많은 상황에서는 포기할 수 없는 걸 먼저 고른 뒤 범위를 좁힌다.
얼핏 본 후기에서 '우니(성게알)'는 필수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홋카이도 앞 바다에서 갓 꺼내 올린 우니를 이 가격에 바로 입에 넣을 수 있으면 고르는 게 맞다.
그렇게 기준을 좁혀보니 나에게 남은 선택지는 별로 없다. 주문한다.
이른 시간이지만 삿포로 클래식도 주문한다.
이른 아침의 목욕으로 빠져나간 수분 때문인지, 온몸이 맥주를 그대로 흡수해 버린다.
어떤 카이센동을 시킬 거냐도 내게 중요한 문제였지만, 진짜는 지금부터다.
어떤 해물부터 입안에 넣느냐는 실질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고민할 시간이 많지 않다. 고민할수록 신선도는 떨어질 테니까.
가장 먼저 참치 뱃살을 집어 든다.
혀에 챡- 하고 달라붙는 서늘한 촉감.
이내 녹아내리기 시작하는 참치의 기름과 살짝의 바다 내음.
동시에 쓰나미처럼 밀려 들어오는 감칠맛.
불가항력으로 찌그러지기 시작하는 진실의 미간.
힘을 줘서 씹지 않아도 아무 저항 없이 부드럽게 짓이겨지는 이 식감.
쌉싸름하고 시원한 삿포로 클래식 한 모금으로 완벽한 마무리.
창밖으로 보이는 함박눈처럼 나도 모르게 함박웃음이 지어진다.
'이게 일본이야! 이게 일본의 맛이지!'
속으로 별의별 주접을 다 떨어본다.
평소 같으면 10분을 넘기지 않았을 혼밥인데,
그렇게 한 점 한 점 소중히 곱씹으며
미간을 찌푸렸다가 웃음꽃을 피웠다가 하니까 어느새 지나버린 30분.
기분 좋은 취기가 살짝 올라오면서 가게를 나선다.
가게 옆 작은 상점에서 예쁘게 컷팅된 유바리 멜론 하나를 사고 털레털레 숙소로 돌아간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아~ 삿포로에 오기를 정말 잘했다.'
매섭게 내리는 눈발이 파타고니아 후리스에 달라 붙을 지 언정
내내 기분 좋은 웃음이 나오는 이 곳. 삿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