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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소연 May 30. 2019

Subway Green

[space story]  02. 지하철

오늘도 나는 지하철을 타.


당산철교가 끊긴 이후로 합정역의 배차 시간이 늦어졌어. 우리 집은 합정역과 홍대의 중간쯤에 있거든. 위치학 상으로 본다면야 홍대에서 전철을 타는 것이 훨씬 유리하지.


그러나 나는 부득불 합정역에서 지하철을 타. 왜냐하면 그것이 지하철 2호선의 시작이기 때문이지.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는 하이힐 끝이 아슬아슬하게 보였어. 밑에서 올라오던 남자의 눈길이 내 미니스커트 속으로 스물, 스물 기어 들어오는 거야. 열일곱 번째의 계단에서 그와 스쳐 지나갔어.


구찌 아젠티 향에 그의 코를 자극했을 거야. 그러나 낯선 남자의 시선 따위에 낭비할 시간이 없어.


자칫하면 국제정치학 강의에 늦을 수도 있기 때문이지. 50대의 대머리 교수는 너무나 깐깐해서 지각생을 세워 놓고 21세기 동북부 국제상황을 말해보라고 시킬지도 모르거든.


지하철 이대 입구에서 강의실까지는 하이힐을 신고 뛰어서 10분이야. 겨우 늦지 않고 강의시간에 도착했어. 2시간의 강의는 빠듯하게 진행됐어.


1교시의 이 강의를 시작으로 목요일은 정말 바빠. 나는 다른 여학생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다른 강의실로 옮기거나, 카페로 가는 것을 뒤로 한 채 서둘러 지하철로 뛰어 갔어.


지하철에 타자마자 교양 중국어책을 꺼내 들었어. 중국어는 예습을 하지 않으면 따라갈 수가 없어. 매일매일 읽기와 독해를 시키기 때문이야.


괜히 하이힐을 신고 왔나……. 어제 새로 산 하이힐에 뒷꿈치가 자꾸 벗겨지면서 따끔거렸어. 그래도 약국에 들려 대일밴드를 살 시간이 없어.


나는 “처페이더사오첸(요금은 얼마입니까)?” “워야오딩저판처더쭤웨이.(이 열차의 좌석을 예약하고 싶습니다)” 등의 중국어를 계속 중얼거렸지.


한양대에 내려 108계단을 뛰어 올라가며, 나는 하이힐을 벗어 던지고픈 충동이 일었지만 참았어. 나는 여대생이니까. 그것도 촌스러운 1학년도 아니고, 그저 놀기 좋아하는 2학년도 아니야. 완숙한 여대생의 절정인 3학년이라구.


아무리 발뒤꿈치가 까져서 피가 철철 흐른다 해도 우아하고 품위 있게 수업을 마쳐야 하는 거야. 이를, 악물었어.


다음 수업은 건대에서 있는 현대 미술의 이해라는 교양수업이야. 뭉크의 ‘절규’라는 그림을 슬라이드로 보면서 괜스레 눈물이 삐질, 삐질 나오지 뭐야. 수업 시간에 한 번도 튀어 본적이 없던 내가 손을 들고 ‘절규’를 다시 보여 달라고 까지 했어.


교수는 내 눈가에 비친 눈물을 보면서 감성이 대단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어. 그리고 원한다면 뭉크 화집을 빌려준다는 거야. 괜찮다며 부득불 사양하는 내 손에 뭉크 화집이 들려졌어.


교수는 무슨 과 누구냐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물으면서, 그 동안 내 수업태도가 가장 좋았다며 지켜보았다고 했어. 나는 눈을 내리깐 채 살짝 미소만 지어 보였지. 교수 눈에는 그 모습이 칭찬을 듣고 부끄러워하는 것으로 보였나 봐. 다음 주에 보자며 어깨를 한 번 도닥여 주더니 돌아갔어.


교수가 등을 보이자마자 나는 서둘러 건대 후문을 통해 세종대로 뛰어갔어. 과학관에서 물리학의 이해라는 교양수업을 들은 후, 서둘러 건대 전철역을 향해 달려갔지. 세종대 앞에는 7호선이 생긴지 오래였지만 나는 2호선이 아닌 다른 지하철은 절대로 타지 않아.


교대에 내려 여성학 교양수업을 들었을 때가 오후 3시였어. 이제 보니 점심도 먹지 못했더군. 목요일은 늘 그래. 이미 오른발 뒤꿈치는 완전히 벗겨져서 나는 악으로 버틸 수밖에 없었어. 이제 오늘 마지막 수업만이 남았어. 마지막 수업은 교양 필수인 ‘영어3’ 이야, 서울대지.


겨우 수업 시간에 맞춰 도착했는데 교수의 개인 사정으로 휴강이었어. 겨우 한 수업을 들으러 서울대까지 피를 흘리며 뛰어 왔는데, 휴강이라니 한숨과 함께 화가 나기 시작했어.


처녀가 아닌 여자가 지나가면 다리가 무너진다는 연못가에 앉아서 하이일을 벗었어. 휴지로 대충 피를 닦아 내고 부운 발을 문질렀지. 잔디밭에는 뭉크 화집이 버려진 아이처럼 축 늘어져 있었어.


하늘이 어둑어둑 해져 왔어. 보통은 서울대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오는 것이 상례였지만, 오늘은 발 때문에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


다 알겠지만 지하철 2호선은 순환선이었어. 그러나 지금은 당산역에서 셔틀버스로 갈아타야 해. 다행히도 셔틀버스의 색깔도 2호선과 같은 그린이어서, 셔틀버스를 탈 때 그다지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아.


서울대 입구 지하철로 내려가는데 미니스커트 속으로 기어드는 시선이 또 느껴지는 거야. 고개를 드니 계단 맨 끝에 서 있는 남자가 보였어. 그런데 낯익은 얼굴인거야. 어디서 봤더라...


나는 재빠르게 뇌의 기억을 재생시키면서 계단을 내려갔어. 열일곱 번째의 계단에서 그와 스쳐 지나가는데,


“이 향수 구찌 아젠티죠?”


코를 벌름거리면서 그가 말을 걸어왔어. 아니, 말을 걸어 왔다기보다는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온 말이어서 나는 그만 계단 난간을 잡고 휘청거리고 말았어. 그가 얼른 내 팔을 잡아 주며 다음 말을 건넸어.


“대일밴드 사왔는데 붙이고 타요”


덜컹거리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대신 뭉크 화집을 가슴에 꼭 안은 채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그의 말을 듣기만 해야 했어.


“금요일은 연대에서 마케팅 수업을 듣고, 충정로역 경기대에서 교양체육으로 재즈댄스를 한 다음에, 마지막으로 서울대 도서관에서 다음주 수업 스케줄을 다시 짜죠?”


눈앞이 캄캄해졌어. 그러나 나는 애써 남자를 무시하며 빳빳이 고개를 들었지. 시선이 머문 곳은 지하철 노선 안내도였어.


내게 있어 어지럽게 얽혀 있는 지하철을 구분하는 것은 1호선, 2호선 등의 숫자가 아니야. 레드 라인, 그린 라인, 오렌지 라인, 블루 라인……. 이런 색깔이야. 그리고 나는 그 중에서 그린 라인을 가장 좋아해.


“나는 건대 축산과 3학년입니다. 교양시간에 그쪽을 보고 반해서 쫓아다녔는데 이상하더라구요. 메뚜기 시간 강사처럼 이리저리 학교를 옮겨 다니면서 수업을 듣더군요. 그것도 2호선에 있는 대학들만 골라서.”


지하철이 당산역에 도착했어. 더 이상 그린 라인은 순환하지 않아. 태양은 기울었고, 지하철에서의 내 세계는 끝났어. 나는 남자를 무시한 채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 지하철을 나왔지.


셔틀버스에 올라타는데 남자가 쫓아 올라오는 거야. 나는 남자의 가슴을 뭉크 화집으로 막은 채 말했어.


“이 책을 교수님한테 전해 주세요. 그리고 앞으로 건대는 내 수업에서 빼겠어요.”


멀리 뭉크의 ‘절규’가 남자의 가슴에서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어. 나는 가방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어. 그 안에는 8개 대학 뱃지가 들어있지. 그 안에서 건대 뱃지를 꺼내 창 밖으로 던져 버렸어. 이제 다시 건대에 갈 일은 없을 테니까.


지하철 2호선 그린 라인에는 8개의 대학이 있어. 그리고 나는 매일 합정역에서 시작해 당산역까지 돌면서 8개의 대학에서 수업을 받으며 3학년이 되었지.


학번은 없어. 전공도 없지. 단지 교양 수업만을 들을 뿐이야. 그리고 4학년이 되어도 나는 졸업 사진도 찍지 못하고, 사각모도 쓰지 못해. 하지만 상관없어. 그린 라인은 계속 순환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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