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조커에서 자신의 농담에 웃지 않는 사람들에게 조커는 정색하고 대답한다. ‘웃음은 주관적인 것’이라고. 도치맘을 보며 처음에는 나도 웃었다. 실제로 이수지 개그맨을 좋아하기도 했고, 그녀가 표현한 웃음 포인트가 꽤 직관적이어서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웃을 수 있었다. 하필 조지라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이름으로 불리는 선생님에게 영어를 배우고, 자기 아이를 제이미라고 부르는 한국 여자의 고상한 영문 어투가 우스꽝스러웠다.
까놓고 보면 배변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제이미의 소소한 천재성을 과장하는 도치맘이 한심스러웠다. 하하하. 정말 바보 같은 제이미 엄마. 사실 나는 웃다가 중간부터 목이 메었다. 과연 나는 도치맘과 얼마나 다를까 싶어서 말이다. 엄마라면 누구나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최대한 능력 있는 선생님과 좋은 환경을 제공해서, 아이가 이 사회에서 유리한 위치에 올라가길 바라는 것이다. 그것은 부모라면 누구나 자신의 후세가 흥하기를 바라는 본능과 닿아 있다. 그런 본능은 아주 사소한 일에도 작동해서 때때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체험 행사에 가면 학부모끼리 은근한 신경전이 벌어진다. 내 아이가 빨리 이 행사를 선점하기 위해서 득달같이 줄을 서기도 하고, 좀 더 오래 장난감을 가지고 놀게 하려고 뒤에서 기다리는 아이를 완전히 무시하기도 한다. 끝끝내 자기 아이만 챙기느라 부모끼리 얼굴을 붉히며 싸우기도 한다. 부모라는 핑계로 자신의 이기심을 그렇게 노출하는 이들을 보며, 과연 나는 그런 적이 없는지 돌아본다.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 자식에 대해서 과대평가는 하지 않는 편이다. 고백하자면 내가 그렇게 잘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학벌도, 재산도, 집안 배경도 간신히 보통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아이는 나를 닮아서 평범했다. 오히려 나보다 더 못한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될 때도 있었다. 그런 아이와 비교하며 내 주변에서는 틈틈 자기 아이를 자랑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알고 보니 그 부모도 나보다 어떤 식으로든 성공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묻지 않아도 자기 스펙을 말했고 휘황찬란한 고급 차를 타고 나타났다. 그 모습에 나는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내 아이도 그 아이에게 졌고, 나도 그 부모에게 사회적인 잣대로 보면 지고 있는 것다. 그렇게 아이는 내 계층을 물려받고 있었다.
아이가 4학년이 되면서 나는 점점 더 심한 격차를 느낀다. 그들은 나보다 좋은 집에 살고, 더 좋은 차를 타고 주식 투자하고 펀드를 사고 상속세를 내지 않고 나를 앞질러 간다. 그들의 아이는 내 아이보다 더 좋은 학원에서 공부 하고 있다. 그 아이는 백 점을 맞고 우리 아이에게 자신의 타고난 천재성을 자랑한다.
도치맘을 보며 나는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자신의 패배를 앙갚음하기 위해 웃고 있는 것은 아닐지 추측해본다. 하지만 나는 나의 비열함이 나를 찔려 마냥 웃을 수가 없다. 이건 그냥 질투심이 아닌가. 도치맘이 무얼 잘못했나. 단지 자기 아이를 나처럼 더 챙기고 있을 뿐이다.
스스로에게 따져 묻는다. 그 뒤처졌다는 감정은 과연 진짜 사실이냐고? 나는 내 아이를 바라보며 내가 사회에 가진 막연한 패배감에 대해서 알아챌 수 있었다. 내가 느낀 패배의 장면은, 돈과 연관 되어있다. 후미진 주택가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며 아파트에 사는 엄마끼리 대화하는 모습이었다. 그들의 아이들과 아파트 놀이터에 낄 수 없었고, 그들이 친목으로 만들어진 아파트 공부방을 나는 알지 못했다. 그렇게 아이를 키우는 동안 나는 내가 끼지 못한 계층을 도치맘이라고 싸잡아서 편하게 부르고 싶어진 것이 아닐까? 나는 집값과 돈이라는 잣대로는 뒤처진게 맞지만, 그것은 자본의 잣대일 뿐이다.
나는 엄마로서 아이와의 관계에 있어서 돈이 없어도 더 좋은 것을 전달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내가 그동안 배우고 공부한 창작의 힘은 돈으로 평가할 수 없는 무형의 가치였기 때문이다. 비싼 학원보다 아이와 최대한 함께 웃으며 보내는 시간, 값비싼 레스토랑보다 가족이 함께 모여 건강한 음식을 직접 해 먹는 일, 엄마와 함께 공부하면서 자신이 어떤 걸 좋아하는지 천천히 탐색하고 알아볼 수 있게 기다려 주는 관계 말이다. 이 모든 일은 단순히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어떤 집단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해도 내가 믿어왔던 따뜻한 세계에서 아이에게 이 세상을 생존하는 방법을 알려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믿음으로 돈은 없지만 자존감을 가지고 아이를 키우고 있다.
도치맘을 놀리는 개그는, 내가 느끼기엔 웃음으로 포장된 폭력일 뿐이다. 나와 같은, 나보다 조금 앞선 집단을 까 내리는 말일뿐이다. 어떤 대상과 특정 집단을 그런 방식으로 깎아내리는 것은 옳지 않다. 같은 엄마인데 내가 왜 그들이 아이에게 잘해주고 싶어서 그러는 것을 모르겠는가. 내가 아니라 다른 이들은 어떤 마음으로 도치맘을 보며 웃는 걸일까? 그것까지는 나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나는 지금껏 좋아했던 개그맨 이수지의 도치맘 캐릭터를 보며 웃지 못한다. 나의 주관적 웃음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