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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우 Jan 29. 2024

동이 트기 전에 나는 떠날 거야

우리 둘만 남아서...


1. 어쩌다 보니 아내와 직장을 바꿨다. 나는 판교로 오고 아내는 제주로 떠났다. 가끔 사람들이 자유부인으로 전직하고 떠난 아내의 안부를 물었다. 그러면 "그분은 행복의 나라로 떠났어요"란 대답을 하곤 했다.


그럼에도 주말에 올라온 아내의 얼굴이 영 좋지 못했다. 먼 곳에서 고생했나 싶어 연유를 물어보니 매일 밤 약속을 잡아 피곤해서 그렇다고 했다. 그리고 일요일 저녁만 되면 남은 시간 대강 때우고 사라져야겠다는 마음으로 있는 것 같았다. 왠지 그 모습이 보기 싫어 육아방향에 대해 어쩌고 저쩌고 하니 이불을 뒤집어쓰고 새초롬하게 말했다.

"동이 트기 전에 나는 떠날 거야"


2. 재하는 내 몫으로 남겨졌다. 5일 중 하루는 장모님과 처형이, 하루는 우리 엄마가 봐줘서 그럭저럭 할만했다. 엄마랑 떨어져 걱정하는 어른들에게 딸은 여섯 밤만 안 넘으면 괜찮다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말했다.


대충 저녁은 이리저리 구르며 지낸다고 해도 아침이 늘 힘들었다. 출근 시간은 다가오는데 딸이 일어나지 않으면 뒷목부터 뜨근해졌다. 10분 더 재우는 자비로운 아버지가 되면 그날 아침에 팀장님께 불쌍한 척하며 전화를 해야 했다. 몇 번 그러고 나니 시간 없다고 모질게 깨우게 되었다. 그러면 재하는 눈 감은 채 외쳤다.

"아빠가 시간이 없지 나는 많아"


3. 퇴근하고 벌어지는 역할 놀이에 너무 피곤했다. '호텔놀이', '병원놀이', '비행기타기 놀이', '유치원놀이', '엄마아빠놀이'등 끝이 없는 무한반복이었다. 이 위기를 타개하고자 'N'사의 스위치라는 게임기를 샀다. 함께 게임하면 1시간은 보낼 수 있지 않을까서였다. 아직 어려 서툴러도 디지털기기에 둘러싸여 태어난 알파세대답게 곧잘 했다.


같이 할 수 있는 게임 말고도 사심을 채우기 위해 '젤다'라는 게임도 샀다. 약 35년 전쯤 한 친구네 놀러 가서 '젤다'를 했는데 정말 신세계였다. 나도 갖고 싶었지만 우리 집 형편으로는 그런 것을 살 수 없었다. 혹시 올해 산타는 게임기를 주지 않을까 싶어 미리 TV에 꽃을 데나 있나 싶어 살펴봤던 기억이 난다. 그렇지만 애초에 연결 구멍 같은 것도 없는 구형 테레비였다. 마음씨 좋은 친구는 게임하고 싶으면 자주 오라 했지만 괜한 자존심에 그 집에 다시는 가지 않았다.


그 게임을 늘 마음에 품고 살았다. 그러다 마침내 딸 핑계를 내고 젤다 최신시리즈를 구입했다. 드디어 손에 넣은 것이었다. 어린아이가 눈물을 흘리며 게임기를 갖고 싶다고 했던 기도는 수십 년 만에 응답을 받았다. 지난한 35년의 번뇌를 끝내고 이제 성불한다는 다짐을 했다.


제주 생활로 마음이 넉넉해진 아내가 토요일에 자유 시간을 줬다. 두근거리며 몇 시간 했다. 그리고 다음날 멀미 및 구토 증상을 보이고 난 후, 당근에 빠르게 팔아버렸다. 아, 전자 오락에도 때가 있는 거구나.


부녀의 즐거운 한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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