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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우 Feb 14. 2020

2월에는 그녀가 온다

바다와 신들

해마다 음력 2월쯤 되면 바람이 많이 분다. 원인은 시베리아 고기압이 약해지는 와중에 중국에서 날아오는 이동성 고기압과 비를 데리고 오는 저기압 간의 교차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바람이 세게 불고 날씨 변덕이 심한 것이다. 하지만 나도 뭔지 모르겠는 이동성 고기압을 옛사람들이 알리 없으니 “꽃샘에 설늙은이 얼어 죽는다”와 같이 이른 봄의 추위를 경계하는 말들로 과학적 설명을 대신하곤 했다. 이와 함께 ‘영등할망’과 같은 초자연적 존재를 등장시켜서 환절기의 희한한 날씨를 설명하려 했던 것 같다. 2월의 계절풍이 의인화된 것이다. 당연히 영등, 곧 2월 할머니는 전국적으로 분포했다. 내륙에서는 ‘영동신’, 영남 해안가에서는 ‘영등할만’, 제주에서는 ‘영등할망’과 같이 부른다. 오는 기간도 각각 달라서 열흘에서 한 달까지 다양했다. 제주 영등할망은 적당히 2월 초하루부터 보름까지 제주에 있다 가신다. 영등이라는 말의 의미나 어원은 정확하지 않다. 한자로는 燃燈, 靈登, 盈騰 등 다양하게 표기된다.



제주 영등굿(출처: 제주도청)



강원도나 경상도의 영등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에 비해서 제주의 영등할망은 바다를 통해 건너온다. 또 육지의 영등은 바람의 신으로 농업과 어업을 모두 관장하는 풍요의 신인 반면에 제주의 영등할망은 어촌의 수호신으로서 어업뿐만 아니라 바닷길의 안전, 해녀 모두를 살피는 그런 신으로 여겨졌다. 북방계 신화에서 등장하는 신들은 보통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비해서 남방계 신화에서의 신들은 땅에서 솟거나 바다를 건너온다. 제주 신화는 남방계에 가까워서 남자 신들은 땅에서 솟고, 여자 신들은 바다를 건너온다. 그래서 영등할망은 바다를 건너오는데 외눈박이 섬, 혹은 ‘강남천자국’에서 들어온다고 했다. ‘강남천자국’은 중국을 상징하는 것으로 동아시아 해양문명의 교류를 보여주는 증거일 것이다. 다른 곳에서 오는 여신들도 있는데 탐라 건국신화에 나오는 세 여신은 일본국에서 온다고 했다. 이를 보면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고대 사회에서도 집단 간 서로 영향을 많이 주고받은 것을 알 수 있다.



아프로디테의 탄생(보티첼리 그림)


우리가 알고 있는 바다에서 탄생한 신은 대표적으로 아프로디테(Aphrodite)이다. 아프로디테는 고대 수메르(주: 지금의 이라크 지방에서 형성되었던 최고(最古)의 문명. BC 5000년경에 시작되어 BC 2300경 바빌로니아의 사르곤에게 멸망된다. 도시국가 위주였으며, 그림문자, 12진법, 수메르 법전 등을 남겼다)에서 섬겨지던 이슈타르(Ištar)에서 연원 되었다. 이런 신앙이 페니키아 지방(주:  지금의 시리아, 레바논 지방. 페니키아 인들은 무역으로 업을 삼았으며 알파벳을 발명했다)으로 건너가 아스타르테(Astarte) 여신이 되었고 다시 키프로스 지방으로 건너가 아프로디테가 되었다. 여신들은 풍요와 다산을 상징했으며 신전의 무녀들은 참배객들과의 성행위를 통하여 이를 형상화했다. 이는 풍요의 의식인 동시에 지도자의 권력을 뒷받침하는 '신과의 결합'을 의미했다. 이런 짓(?)들이 못마땅했던 후대의 그리스도 교인들은 이슈타르를 ‘아스타로트(Astaroth)’라고 하는 몹쓸 악마로 만들어버리기도 했다. 어쨌든 헤시오도스(Hesiodos)(주: BC 8세기경 살았던 그리스의 서사시인. 호메로스와 동시대인으로 평가된다. 대표적인 저서로 『노동과 나날』, 『신들의 계보(Theogonia)』가 있다)에 따르면 아프로디테는는 거인족 우라노스의 성기가 바다에 떨어져 그의 정액과 바닷물이 섞이면서 생겨난 거품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아프로디테는 ‘거품에서 나온 여인’이라는 뜻이다. 워낙 광범위하게 섬겨진 신이라서 제우스 신앙이 확립된 이후에 다른 여신들은 제우스의 아내나 딸로 위치가 격하되었던 반면에 아프로디테는 제우스의 고모뻘로 살아남았다. 다만 풍요를 상징했던 여신에서 ‘아름다움(美)’을 관장하는 정도로 남게 된 것이다.



이슈타르 여신(수메르, bc19~18세기)


바다로 사라져 버리는 신도 있다. 잉카(주: 페루 지역에 있던 제국. 13세기에 발흥하여 1536년 스페인의 피사로에게 정복당했다) 신화에 등장하는 ‘비라코차(Viracocha)’라는 신이다. 그는 잉카 신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신이고 모든 것을 창조했다고 한다. 태양과 폭풍의 신이며 손에는 번개를 쥐고 있었다. 창조신답게 막 너그럽지는 않았는지 자기가 만들어 낸 사람들이 말을 안 듣자 두어 차례 멸망시켰다고 한다. 그러고도 인간들이 서로 싸우자 눈물을 흘리며 바다로 사라져 버렸다. 언젠가는 돌아오겠다고 하면서 말이다. 한때 비라코차는 백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도 전해졌다. 그래서 스페인 인들이 잉카를 정복하려 들어왔을 때 잉카인들은 비라코차가 돌아왔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대의 학자들이 밝혀낸 바로 비라코차가 백인이었다는 문헌 증거는 스페인 신부들이 남긴 것으로 잉카인들이 그렇게 생각했던 증거는 없다고 한다. 아마 스페인인들은 그리스도교 포교가 잉카 식민 지배의 명분이었으니 그런 식의 서술을 남겼는지도 모르겠다. 곁가지로 그들은 비라코차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중에 한 사람인 성 바르톨로메오(St.Bartholomaeus)와 동일인이라고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잉카의 비라코차



제주의 영등할망은 2월 초하루에 한림읍으로 건너와서 한라산을 거쳐 우도로 제주를 빠져나간다. 바닷길을 따라 걸으며 보말을 까먹으면서 다닌다고도 한다. 재미있는 건 영등할망이 딸을 데리고 오면 바람이 불고 며느리를 데리고 오면 비가 오는데, 며느리를 데리고 와야 풍년이 든다고 전해진다. 주고받는 것도 확실해서 접대받은 만큼 씨를 많이 뿌려주고 삐지면 그냥 가버린다고 하니 성격이 그리 좋지는 않은 것 같다. 오죽하면 영남 지방에는 잘 삐지는 사람에게 “영동할매 삐치듯 한다”라는 말도 있다는 걸 보면 말이다. 



이제는 슬슬 봄이 온다. 제주에 간다면 영등할망 길로 가보자. 어르신이 다녔던 곳들은 드라이브하기 좋은 길이다. 가족 중에 잘 삐지는 사람이 있어도 구슬려서 함께 봄을 맞으며 보말 죽이라도 한 그릇 먹으면 더 사이가 좋아지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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