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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우 Mar 13. 2020

훈련소의 아이유

좋은 날을 찾아서

나는 2010년 11월에 입대했다. 그때 북한이 연평도에 포를 쐈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군대 상태는 심각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K2를 껴안고 잤다고 했다. 보통 문서상으로만 총을 메는데 그때는 진짜였다. 그나마 군대에서 FM대로 한다는 훈련소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었다. 엄혹했던 가을, 내가 육군 훈련소에 들어갔다.     



인간개조의 용광로...호국요람(출처 : 인터넷이미지)



그렇지만 아무리 무게를 잡아도 군대는 군대였다. 훈련소도 당연히 군대였다. 처음에야 조교는 소리 지르고 훈련병은 얼차려 받고 구보도 행군도 각 맞춰서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동아리처럼 변해갔다. 인지상정은 금방 살아났다. 바깥세상에서는 북한과 우리나라가 서로 험악한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는데, 모든 매체가 통제된 훈련병들은 그걸 알 길이 없었다. 그것보다 영부인께서 훈련병들 힘내라고 밥 퍼주러 온다는 게 더 중요한 문제였다. 어떻게 알았냐면 그분이 오시기 전 검은 정장에 선글라스를 낀 덩치 큰 분들이 오셔서 훈련소 내 모든 총의 공이를 수거해 갔기 때문이었다. 영부인이 밥 준 훈련 연대는 두발 정리를 한 번 더 해야 했고, 우리는 신발에 관심 많으신 영부인이 보실지 모른다며 전투화가 광이 나게 닦아야 했다. 옷은 거지꼴을 하고 있는데 신발만 반짝거리면 뭐하냐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무튼 그 답례로 우리는 미니 칸쵸 등이 들어있는 약소한 과자 묶음을 선물로 받았다.     


사회 소식은 편지로만 알 수 있었다. 국방일보도 있긴 했다. 하지만 북한이 포를 쐈던 때라 우리의 똘이장군이 곧 김정일을 때려잡으러 갈 것이라는 기사만 넘쳐났다. 덕분에 주장이 과하면 헛웃음이 나온다는 좋은 것을 배울 수는 있었다. 반면에 훈련병들이 받은 소식들은 이런 애국적 내용과 별 상관이 없었다. 주로 스포츠나 연예계 흥밋거리들이 많았다. ‘박지성이 골을 넣었대’와 같은 이야기면 우리들은 사흘 밤낮을 떠들 수 있었다.           


그 중심에는 아이유가 있었다. 사실 그전까지는 아이유가 누군지 잘 몰랐다. 입대하기 전 친구들과 제주도 여행을 갔는데, 그중 누군가가 CD에 아이유의 ‘잔소리’를 담아 와서 그때서야 ‘이런 가수도 있구나’ 했다. 나야 스물여덟 살 먹고 군대 갔으니 그렇다 쳐도 스무 살, 스물한 살 애들도 일부만 아는 그런 가수였다. 그런 상황이었는데 훈련병들이 받는 편지들에 동시다발적으로 아이유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용은 비슷했다. 아이유라는 어린 가수가 ‘좋은 날’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그게 쩐다, 한국이 폭발할 정도다 이런 얘기였다. 심지어 곧 스물아홉 살이 되는 내가 받은 편지에도 아이유의 삼단 고음 이야기가 있었다. 우리들은 이 ‘좋은 날’이 도대체 뭐길래 이 난리냐고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우리의 처지에 즉각적으로 상관있었던 북한 소식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아이유의 ‘좋은 날’을 바로 들어볼 수 없다는 사실에 우리는 그제야 사회와 완전히 단절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리 조교와 친해졌어도 ‘좋은 날’을 한 번 들려달라는 부탁을 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우리 담당 조교는 이등병이었다. 이등병이 훈련병들에게 ‘좋은 날’을 들려주다 선임들에게 걸리는 날이면 그 친구나 우리들에게 아주 ‘좋은 날’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떻게든 듣고 싶었고 들어야 했다.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훈련소에서 머리 쓸 일은 거의 없었는데 우리는 ‘좋은 날’을 위해 두뇌를 가동시켰다.     


일단 가사는 알고 있었다. 편지에 적혀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저녁의 정비 시간마다 시 낭송회를 열었다. 누군가 ‘나는요 오빠가 좋은 걸’을 낭독하면 그 침상에 있던 모두가 자지러졌다. ‘으아악 오빠가 좋대’와 같은 비명에 가까운 신음소리를 내다가 조교에게 걸려서 얼차려를 받기도 했다. 그래도 오빠가 좋다니 웃을 수 있었다. 물론 웃다 걸리면 5분 엎드려 있을 것을 10분 해야 했다. 관건은 멜로디였다. 편지에 노래 가락을 담을 수는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차라리 악보를 보내달라고 할 것을 그때는 누구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곳곳에 단서는 있었다. 일단 우리 위층에서는 정비 시간 내내 ‘좋은 날’을 틀고 있었다. 내가 있던 막사는 1층은 훈련병들이 쓰고 2층은 조교와 같은 기간병들이 사용했다. 기간병들은 TV를 볼 수 있었기에 ‘좋은 날’ 뮤직비디오를 시도 때도 없이 틀어놓고 있었다. 우리는 그 노래가 나올 때면 서로 조용해보라고 외치며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들리라는 멜로디는 들리지 않고 ‘웅웅웅~’ 거리는 중저음의 베이스음만 은은히 들렸다. 위층에서는 얼굴은 잘 몰라도 아이유라는 분이 오빠 좋다고 외치고 있는데 우리는 갈 수 없었다. 지구 한 바퀴 도는데 하루도 안 걸리는 세상이었지만 계단 서른 개를 못 올라갔다. 가끔 식당에서 배식을 하고 뒷정리를 할 때도 조리병들이 쓰는 방에서 ‘좋은 날’로 추정되는 노래가 들리기도 했다. 너무 멀어서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노래에 ‘빰빰빰 빠밤~’하는 브라스 세션이 들어간 것은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전설상의 노래 ‘좋은 날’ 부스러기들을 모았다. 이것을 가지고 뼛조각으로 공룡 화석 복원하듯 멜로디를 맞춰나갔다. 가사만 알고 있다면 ‘좋은 날’은 향가와 다를 것이 없었다. 고전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에서 사라졌다는 ‘희극’의 한 구절이라도 찾아내기 위해 오늘도 양피지를 수없이 벗긴다고 했다. 이제 그 마음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갔다. 실용음악과 다닌다는 한 친구가 우리의 집단지성을 모아 선창을 했다. 처음에는 그럴싸했다. 하지만 듣다 보니 어디서 들어본 음률이었다. 잘 들어보니 ‘육군훈련소’ 노래와 비슷했다. 전공자도 이 단서들만으로는 어쩔 수 없었다.     


‘좋은 날’을 들을 수 있는 다른 방법으로 종교행사가 떠올랐다. 종교행사에서는 종종 유행하는 뮤직비디오를 틀어주는 일탈(?)이 허용되기도 한다는 거였다. 우리는 부푼 꿈을 안고 일단 교회로 갔다. 예배당 저쪽에 동자승처럼 머리를 바짝 밀은 무리들이 보였다. 순간 여기가 절인가 했다. 곧 영부인께서 방문한 연대 애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속으로 과자 주지 말고 ‘좋은 날’이나 한 번 보여주지 했다. 예배가 시작되고 목사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외치셨다. 하지만 훈련병들에게 구원은 아이유뿐이었다. 이때 목사님이 외쳤다.

“여러분이 기다리신 그것!!!”

혹시!!!!!

“이것 때문에 일주일을 버틴 다는 그것!!!”

아이유???

스크린이 켜졌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드디어 보는 건가.

“실로암!!!”

사방이 웅성웅성했다. 훈련소 교회의 실로암이 유명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오기 전에 ‘좋은 날’ 뮤직비디오를 틀어줄 것이라는 비공식 루머가 돌았기에 실망이 아주 컸다.

“어두운 밤에~ 캄캄한 밤에~ 새벽을 찾아 떠난다~”

내 마음이 어둡고 컴컴했다.     



이것이 육군훈련소 실로암..



다른 대안으로 급부상한 것이 절이었다. 훈련소 사찰은 ‘불교 나이트’라고 불린다고 했다. 저번 주에 ‘좋은 날’ 뮤직 비디오 틀어줬다는 소문도 돌았다. 내 동기들은 저녁 종교행사는 다들 절로 간다고 했다. 나는 고민했다. 저번 주에 콘칩 준다기에 성당에 갔었다. 천주교는 비슷하기라도 하지 이번 주 절에 가면 영혼을 완전히 팔아버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좋은 날’을 볼 수 있다니 큰마음먹고 잠시만 불교에 귀의하기로 했다. 예수님도 훈련소 계셨으면 충분히 이해하셨을 것이라는 자기 합리화도 했다.      


절에 갔다. 스님이 무슨 경전을 외셨다. 물론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때 스님이 외치셨다.

“여러분이 기다리신 그것!!!”

이번에는 진짜다. 여기는 불교나이트니까.

“이것 때문에 일주일을 버틴 다는 그것!!!”   

나는요~ 오빠가~ 좋은 걸~

스님 뒤에 있던 베일이 젖혀졌다. 심장은 또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나오라는 스크린은 안 나오고 나이 지긋해 보이시는 어머님들이 나오셨다.

“여러분을 위해 위문 공연을 오셨습니다!!!”

“부처님의 사랑은~”

찬불가가 울려 퍼졌다.      


나는 아이유가 보고 싶어서 영혼을 팔아 절에 갔는데 아주머님들이 부르는 찬불가나 듣고 왔다. 사실 우리 집은 5대째 교회에 다니는 집이었다. 그 자손이 찬불가와 영혼을 바꾸다니, 조상님들이 통곡할 이야기라는 건 둘째치고 기회비용이 너무 비쌌다. 나중에 조교들에게 슬쩍 들으니 원래 종교행사에서 뮤직비디오는 잘 틀어줬다고 했다. 그렇지만 북한이 포를 쏘자, 군대에 환상이 있으셨던 높으신 분들이 ‘편한 군대보다 강한 군대’를 외치셨고, 그 여파로 군기를 저해하는 모든 행위들이 금지됐다는 것이었다. 그분들은 ‘우리의 주적은 북한’을 수백 번 외치는 것보다 ‘좋은 날’ 뮤직비디오 틀어주는 것이 훨씬 사기에 도움된다는 점을 잘 모르셨다.     


아아...


최후의 방법으로 떠오른 것이 논산지구병원으로 외진을 나가는 거였다. 거기에는 진료를 기다리는 동안 TV를 볼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쯤 되면 소문을 믿지 않을 만 한데 ‘좋은 날’에 상사병 걸린 수많은 훈련병들은 줄을 지어 의무대로 향했다. 일단 의무대 군의관이 통과를 시켜줘야 지구병원으로 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좋은 날’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훈련병들의 꿈은 잠시 뿐이었다. 의무대 군의관은 외상은 빨간약, 내상은 아스피린을 처방했다. 동기들은 마지막 잎새가 떨어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울면서 막사로 돌아갔다. 의외로 나는 지구병원 외진이 허가되었다. 꽤 위중한 증상을 보였다는 것이었다. 나이도 많은데 고된 훈련을 받았던 나는 결국 폐렴에 걸려버렸다.       


함께 간 많은 동기들 중 지구병원은 나만 가게 되었다. 훈련병 동기들은 나에게 ‘좋은 날’을 꼭 잘 보고 와서 불러달라고 했다. 그들의 작은 염원을 담아 나는 병원으로 갔다. 지구 병원은 환자가 넘쳐났다. 왜 보내달라는데 안 보내주나 했는데 여기는 또 나름의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그건 다 차치하고 사방이 TV 스크린이었다. 그 화면마다 한 여자분이 있었다. 누군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 저분이구나. 저분이 대세 아이유구나. 군대 와서 처음으로 진정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     


다만 생각하지도 못한 구석이 있었다. 지구 병원 TV에는 소리가 나오지 않고 화면만 나온다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에 완전히 마음이 상했다. 음소거된 향가 공연 실황만 지겹게 볼 수 있었다. 내 증상은 꽤 위중했는지 군의관이 물었다.

“너 입원할래?”

“아니요. 그냥 있겠습니다.”

그리고는 터덜터덜 시무룩하게 막사로 돌아왔다. 입원이고 뭐고 아무 따질 겨를이 없었다. 나중에서야 생각해보니 입원하면 병실에서 TV를 볼 수 있었을 텐데 그것도 생각 못했다. 아무튼 후반기 교육을 가서야 아이유의 ‘좋은 날’을 영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대에 가자마자 입원을 하지 않은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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