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청청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서 있었다. 어쩐지 장청청의 주변 공기도 멈추어 서 있는 것만 같았다. 빠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 아이는 뭔데 이렇게 태연할까? 내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한 모양이지? 하고 빠무는 장청청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흠칫 놀랐다. 장청청이 쿡쿡하며 웃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장청청은 너무 재미 있었다.
한국에 온 것도 재미있었다. 중국에 퍼뜨려놓은 바이러스로 세상이 벌컥 뒤집어지고 있는 것도 재미있었다. 그리고 자기의 몸 안에서 치솟아 오르는 무엇인지 모를 충동도 재미있었다.
장청청은 다시 쿡쿡 웃었다.
빠무는 뭔가 불안하다고 느꼈다.
장청청의 웃음은 뭔가 정상이 아니라고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빠무는 이번에는 주영범 쪽을 바라보았다. 주영범은 말없이 서 있었지만 빠무는 그의 입술이 삐쭉거리며 웃으려 하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위험해! 좋지 않아!'
빠무는 속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빠무는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 그의 일족은 금제를 당한 상태였다. 수 백 년을 고통받아온 금제였다. 빠무가 모시는 주인은 오랜 세월 그 금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금제를 한 그들도 이제는 그 땅에서 물러갔다. 이제 노력하기 따라서 주인은 풀려날 수도 있을지 모른다. 이런 중차대한 시기에 내가 좀 무섭다고 해서, 위험하다고 해서 빠무는 뒤로 물러설 수 없었다.
빠무의 목적은 주영범이었지만 장청청이 가만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빠무는 생각했다.
'그래서. 저 계집아이가 어쩔 것이야?'
그렇다. 천년 가까이를 살아온 빠무가 한낱 인간 계집아이에게 겁을 먹는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이렇게 생각하자 빠부는 갑자기 긴장이 풀렸다. 그리고는 하늘을.. 아니 PC 방의 천장을 바라보고는 크게 웃었다.
"크크키아아아악...!!!"
빠무의 목소리는 쇠붙이가 부딛히는 것 같이 시끄럽고 탁했다. 빠무가 계속 웃자 빠무의 입에서 어금니가 점점 길어지며 바깥으로 삐져나왔다. 빠무의 머리카락도 큰 바람이라도 부는 것처럼 폭풍 속에 있는 것처럼 허공으로 치솟으며 흔들렸다. 그렇다. 빠무의 내공이 실린 웃음소리는 방안을 가득 채우고 PC 방 바깥으로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바깥에서 상황을 모니터링하던 국정원 인원들도 모골송연한 목소리에 진저리를 쳤다.
그런데 빠무의 웃음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이번엔 장청청이 웃기 시작했다.
"호호호호호호...."
간드러진 장청청의 웃음소리가 나지막이 시작하더니 점점 더 커졌다. 그리고는 빠무의 소리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빠무는 내공이 실린 자신의 목소리가 장청청에게 눌리자 크게 놀랐다.
'아니 이 계집아이가? 어찌 내 오백 년 내공을 압도한단 말인가?'
빠무는 감자기 웃음을 거두고 장청청을 노려 보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아이야. 너는 도대체 누구냐? 아니 뭐냐?"
장청청도 웃음을 거두고 빠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얼굴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고 어쩐지 교태가 가득했다.
"아이고 언니. 누구라니요? 뭐냐니요? 전 그저 젊은 여자죠!"
장청청은 말을 마치고는 양손으로 허리를 붙잡고 다시 한번 깔깔 웃었다.
빠무는 오늘 일이 좋게 끝나기는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장청청의 웃음소리로 그녀의 내용이 자신을 압도한다는 것을 알았거니와 여유작작한 모습을 볼 때 자신을 안중에 두고 있지도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아. 어쩌면 오늘이 내 제삿날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빠무는 자신의 주인을 떠 올렸다. 주인이 겪고 있는 고통과 원한을 생각하면 빠무에게 다른 선택은 없었다. 빠무는 침통하게 고개를 숙이더니 다시 한번 앙천대소를 하였다.
"노신이 살아온 세월이 천년이 다 되어 간다. 오늘 이런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 것을 만나 저세상 구경을 하게 생겼구나. 만나면 헤어지고 파하지 않는 연회는 없는 법! 다만 주인에 대한 도리를 다 하리라. 계집아이야. 조심해라!"
빠무가 심각한 얼굴로 양팔을 옆으로 폈다. 기를 운행하자 빠무의 옷과 머리칼이 광풍노도처럼 흔들렸다.
장청청도 이 모습을 보고는 심각한 얼굴로 손바닥을 하나는 하늘로 다른 하나는 땅으로 향하게 했다.
"할머니. 보통 사람이 아니니 제가 한 말씀만 드리지요."
빠무는 고개를 돌리며 흥하고 코웃음을 날렸다. 장청청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할 말을 계속해 갔다.
"할머니.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저도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저는 천지조화를 타고 대지에서 홀로 태어난 몸입니다. 이건 비밀이지만 할머니는 이제 가실 분이고 영범 오빠는 남이 아니니 상관없겠지요. 할머니 조심하세요."
말을 마친 장청청은 미끄러지듯이 앞으로 다가왔다. 빠무는 이마에 힘줄이 돋을 정도로 내공을 끌어올리고는 이윽고 용수철이 튀어 나가듯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다음 순간 이미 빠무의 심장은 장청청의 손이 관통하고 있었다.
"할머니, 심장이 아직도 뜨겁네요. 잘 가세요."
빠무는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장청청의 손에 들린 자신의 심장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가까스로 몇 마디를 지껄였다.
"아... 거저스(噶泽寺)로 가야 하는데... 거저스... 마취허... 주인님... 임무를 망친 저를 용서하세요..."
빠무는 비틀 거리며 쓰러졌다.
장청청은 손에 든 빠무의 심장의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는 우엑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조용히 바라보고 있던 주영범이 차분하게 두 손을 들어 천천히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장청청의 눈은 금방 도화빛이 돌기 시작했다. 주영범은 박수를 치며 천천히 천천히 걸어 나왔다.
장청청은 교태를 떨며 자기도 주영범을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갈수록 주영범의 모습이 이전과 상당히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머리카락을 찾기 힘들었던 머리에 이젠 제법 수북하게 머리칼이 자라 있었다. 늘어진 눈도 탄탄하게 올라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눈빛이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얇았던 팔은 근육이 붙어 있었고 배불뚝이였던 몸통은 그런대로 줄어들어 있었다. 장청청은 기뻤다. 장청청은 콧등에 주름을 잡으며 애교를 떨어 보였다.
이런 장청청을 보는 주영범의 얼굴에는 웃음이 절로 걸렸다. 영범은 청청의 메일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아제 완전히 알 수 있었다. 청청이 사람이네 아니네 하는 것은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까지 겪은 일들 중에 정상적인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이제 운명이 시키는 대로 나아갈 뿐이었다.
두 남녀가 서로 가까이 가며 양손을 올려 잡았다. 주영범의 눈에 장청청을 귀여워하는 빛이 떠오르자 이를 알아차린 장청청은 약간은 부끄러워하며 낯을 붉혔다. 그리고 그 순간 장청청의 눈빛이 흔들렸다. 장청청은 고개를 숙여 몸을 바라보았는데 복부에서 붉은빛 액체가 스멀스멀 퍼져 나가고 있었다. 피였다! 장청청이 고개를 들어 주영범을 바라보자 주영범의 눈을 크게 뜬 놀라는 얼굴이 보였다.
두 사람이 손을 마주 잡고 있는 PC 방에는 국정원의 요원들이 들이닥치며 총을 겨누었다. 장청청은 미끄러워 지며 쓰러졌는데 마치 슬로 모션을 보는 것 같았다. 주영범은 반응을 하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장청청의 몸을 붙잡을 뿐이었다. 주영범의 앞에 다가와 선 것은 바로 김팀장이었다.
"주영범 씨? 우리와 같이 가셔야겠습니다."
김팀장의 뒤로는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이 들이 닥쳤다. 그들은 들것에 장청청을 실고는 주변의 물건들을 이것저것 만지며 무엇인가를 부산스럽게 작업을 하는 것이었다.
김팀장은 주영범에게 무엇인가를 내밀었다. 방호복이었다.
"어서 이 방호복을 입으시오. 이 여자의 몸에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있을 수 있으니 말이오"
하지만 주영범의 귀에는 김팀장의 목소리는 멀리서 들릴 뿐이었다. 장청청을 다시 만난 것에 이렇게 자신이 기뻐할 줄은 정말 몰았다. 그리고 장청청이 쓰러진 것에 이렇게 분노가 치밀어 오를 줄도 몰랐다. 하지만 자신이 왜 이러는지 몰랐기에 혼란스럽기도 했다.
"갑시다. 상황에 대해서는 본부에 돌아가서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김팀장이 다시 손으로 재촉하자 주영범은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방호복을 받아 들었다. 그는 정말이지 터질 것만 같았고 그것이 무서웠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묵묵히 김팀장을 따라나섰다. 모두가 떠난 PC 방은 마치 전쟁터처럼 보였다. 그리고 다시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장소처럼 보였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