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
안개
- 은상’s #인스타소설
판시판의 안개는 살아 있는 듯 꿈틀거렸다.
숨을 쉬면 내 안으로 안개가 들어와 몸 속이 꽉 차는 느낌이었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 해를 볼 수 있더더니….’
익히 들었지만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얼굴이 희미해 보일 정도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사실 크게 상관 없었다.
이미 혜원이와는 대화가 끊어진 지 오래였고, 이곳 판시판까지 놀러온 것도 몇 달 전에 예약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노이까지 4시간 반을 비행기를 타고 또 야간버스로 6시간을 달려서 이곳까지 오는데도 아무 대화가 없었다.
‘이곳에서 내려가면 정말 헤어져야지.’
나는 안개 속에서 생각했다.
올라오는 트램을 편도로 끊었기 때문에 캐이블카를 타는 곳까지는 걸어서 내려가야 한다. 한 20분쯤 걸어내려가면 될 것이다.
“그냥 내려가지?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아무 아쉬움이 없었다.
안개에 젖어 축축한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두어 계단쯤 내려 갔을까? 혜원이 내 손을 잡았다. 안개 때문인지 그 손도 축축했다.
난 더는 정을 주기 싫어서 슬쩍 손을 뺐다.
하지만 혜원의 손은 다시 내 손을 파고 들었다.
옆을 슬쩍 돌어보았다. 안개가 심해 그 얼굴도 희미해 보였다.
우리는 말 없이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갔다.
손을 잡고 있기 때문일까? 그녀에게 미안한 감정이 생겼다.
사실 정이 떨어진 것도 내가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었기 때문이었다. 같은 직장에 다니는 동료와 몇 번 술을 마신 다음부터는 혜원은 눈에 차지 않았다. 그녀 쪽에 훨씬 더 내 스타일에 가까웠다. 그쪽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고….
이왕 생각이 난 김에 말해야겠다.
“우리 여기서 내려가면 각자의 길을 가자. 우린 스타일이 전혀 안 맞아. 내가 비행기 표를 바꿔서 먼저 갈 테니까, 넌 계획대로 더 즐기고 와.”
난 앞을 보고 말했다. 마치 안개에게 말을 거는 듯했다.
혜원은 여전히 내 손을 잡고 있었지만, 손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우는 건가?’
계속 손을 잡고 걷는 것도, 갑자기 놓는 것도 이상했다.
“아쉬워도 어쩔 수 없어. 지금까지가 딱 좋아.”
내말에 혜원이 걸음을 멈췄다.
난 다시 그녀를 돌어보았다. 안개 속에서 눈빛이 빛났다.
혜원은 순간적으로 내 손에서 손을 빼더니 내 가슴을 밀쳤다.
난 뒤로 밀려나다가 가까스로 난간을 잡고 멈췄다.
난간 너머를 바라보는데, 그 순간 잠시 안개가 바람에 밀려 사라지며 아래가 보였다.
천길 낭떠러지였다. 3143미터,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는 설명이 이해가 됐다.
“무슨 짓이야? 죽을 뻔했잖아!”
난 화가 나서 소리쳤다.
혜원은 그런 나를 두고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킥키끽.”
혜원에게서 처음 들어보는 희한한 웃음이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났지만 쫓아 올라가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이렇게 끝낼 거였다. 그냥 두고 가면 될 일이다.
난 화난 발걸음을 재촉해 안개를 뚫고 캐이블카 승강장까지 왔다.
그런데 앞쪽 벤치에 혜원이 있는 게 보였다.
“넌 왜 거기 있어? 아까….”
“뭔 소리 하는 거야? 지겨워서 아까부터 내려와 있었는데.”
혜원이 예의 그 까칠한 눈을 흘기며 말했다.
그러면 아까 그건 뭐였지?
“우리 여기까지 하기로 해. 오빠의 그 우유부단한 성격 참아주는 것도 이제 한계이고, 또 나 좋아하는 사람도 생겼어…. 뭐야? 내가 말하고 있는데 어디를 보는 거야?”
혜원이 내 앞까지 다가와 손을 휘휘 휘둘렀다.
난 혜원이 하는 말이 들리지 않았다.
아까 내 손을 잡던 그 축축한 손만이 생각날 뿐이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