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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른이 된 피터팬 Jun 13. 2021

#타협의 온도

타협 : 당신과의 온도 맞추기

타협_당신과의 온도를 맞춰봅니다

나는 타인과의 관계가 어렵다. 단적으로 이야기하면 나는 내가 타인에게 닿을 수 있는지를 의심한다. 만약 외부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의 실체에는 결코 접근할 수 없다. 눈앞에 드러나는 세계는 내 마음에 의해 재구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세계의 진짜 모습이 아니다. 나의 감각기관을 통해 왜곡되고 재구성된 모습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모두 자폐아다.
관계의 아득함. 소통의 노력이 온갖 오해로 점철될 수밖에 없다는 확고한 이해. 이것이 외로움의 본질이다. 우리는 선택해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 타인에게 닿을 수 없다는 진실을 인정하고 외로워지거나, 타인에게 닿을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며 매번 좌절하거나.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中


일주일에 두세 번 만났던 친구가 있었다. 나처럼 걷는 것을 좋아했고 나처럼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자주 만나 함께 좋아하는 것들을 같이 했다. 서로의 생일을 챙겨주기로 약속했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케이크에 촛불을 켜주러 갔다. 그 친구가 연애를 시작했다. 나의 생일을 잊었다. 한 달에 한번 안부를 묻는다. 세 달간 연락이 없다. 매번 내가 먼저 톡을 보내는 게 자존심이 상해 나도 연락을 안 하게 되었다.


친구가 잘못한 것은 없다. 이 친구는 그냥 연애를 시작하면 연애에 집중하고 친구와는 소원해지는 스타일일 뿐인데.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서운해지는 마음이 들었다. 내가 더 많은 마음을 주고 있었구나. 이제는 그 친구와 나 사이의 온도가 달라졌다. 친구의 온도가 달라졌으니 나도 그에 맞게 온도를 낮추기로 했다. 온도를 맞추면 관계에 목매달지 않게 된다. 집착하지 않아야 서운한 것도 없고 관계가 오래갈 수 있다.


지금은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며 그들과 추억을 만들고 즐거움을 공유하고 있다. 물론 이 관계의 온도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며 혼자 너무 뜨겁거나 차갑지 않게 그들과의 온도를 맞추어 가고 있다. 거의 모든 관계는(연인 사이는 또 다른 온도계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온도를 맞추는 노력이 동반된다. 혼자 너무 뜨겁거나 너무 차가우면 그 간극에서 오해가 생기고 서운함이 생기기 마련이다. 시비(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지만, 그 관계를 (내가) 편하게 대하기 위해, 오랫동안 이어가기 위해 대상과의 온도를 맞추는 것. 어쩌면 그것이, 인간의 사회화라는 생각이 든다.



사회화, 사회성에 대한 생각을 갑자기 하게 된 것은 아니다. 꽤 오래전에 종영한 <이태원 클라쓰>라는 드라마를 이제야 봤다. 그 드라마의 주인공인 박새로이라는 인물을 보면서 사회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 것이다. 도대체 사회성은 무엇이며, 어떻게 길러지는 것이며, 이것을 강제해야 하는 것일까 등. 드라마는 부와 권력의 오남용(갑질), 정의감, 복수, 절치부심, 사랑이란 감정 등 다양한 요소들을 담고 있었지만 내게 유난히 다가왔던 것은 박새로이라는 인물의 비사회성이었다.


자기 소신과 철학을 고집하며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박새로이. 세상 사람들은 그를 사회성이 떨어지는 놈이라고 부른다. 그는 분명히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회성이 없다는 게 옳고 그름의 기준에서 틀리다는 의미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사회성은 시비(是非)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사회성이 없다는 것은 어쩌면 이 사회를 살아가기 다소 불편하고 피곤하다는 의미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세상과 타협하지 않겠다, 나의 소신을 고집하며 융통성이 없더라도 불편을 감수하며 살겠다는 의지.


앞에서 말했듯 사회와 사회 속 많은 타자들과의 온도 간극을 좁히고 맞추는 노력을 하는 것은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상사의 비위를 맞추는 것, 사람들 사이의 분위기를 감지하고 그 온도에 맞게 나의 태도를 바꾸는 것(혹은 눈치 보는 것), 나의 신념과 소신이 있지만 세상의 온도에 맞추어 어느 정도 온도를 내리는 것. 자아의 밖에 존재하는 세계(타자, 체계, 사회)와 온도를 맞추는 것을 "타협"으로 본다면, 그러한 타협은 나의 온도를 대상의 온도에 맞추고자 하기에 에너지 소모가 크다. 힘든 일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인간은 사회적 동물.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본인 뜻대로 살아간다면 사회 내에서 받는 불이익과 불편함 역시 크다. 온도를 세상에 맞추는 노력과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내 온도를 지키며 살아갈 때 소모되는 에너지를 손익 분석해보면 대다수는 타협/사회화를 선택한다. 더 큰 면적의, 더 넓은 부피인 외부세계의 온도에 나의 온도를 맞추는 것이 좀 더 에너지 효율적인 방식이고 쉽기 때문이다. 나같이 평범한 사람은 세상에 잘 녹아들어, 편하게 살기 위해 타협하고 사회성을 키운다.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극 중 소신과 신념을 지키며 고집스럽게, 그래서 조금은 외롭게 살아가는 박새로이처럼, 많은 성공한 CEO들, 그리고 아인슈타인 같은 비범한 인물들은 사회성이 부족한 케이스가 적지 않다. 외로울 수 있지만 비범함을 택한 이들의 삶을 틀렸다고 할 수 없다. 다만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타자와 사회의 온도에 자신의 온도를 맞추며 살아갈 뿐이고 남들도 그럴 거라 예상할 뿐이다.


철학적인 측면에서, 세상에 실존하는 모든 이는 크게 두 가지 관계를 맺게 된다. 나 자신과의 관계, 그리고 자아 밖 세계와의 관계. 내가 아닌 것은 나와 다를 수밖에 없고, 그 온도차는 항상 존재하기에 후자의 관계는 항상 힘(에너지)이 든다. 많은 사람들이 친구와의 관계, 상사와의 관계, 조직과의 관계를 힘들어하고 고민하고 에너지를 소비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온도차가 극심하면 그 온도에 나를 맞추다가 번아웃이 되고, 나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그럴 때는 온도차가 적은 다른 대상, 다른 조직, 다른 세계를 찾는 것도 좋은 대안이 된다. 지금 맺고 있는 타자와의 관계가 너무 힘들다면 그 온도차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나도 지키고 세계와의 관계도 지속할 수 있으니까.


정답은 없다. 나는 박새로이 같은 인물은 못되어 세상의 온도에 나의 온도를 맞추기로 했다. 보이지 않는 이 온도계가 깨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딱 그 정도로만 타협하는 노력을 하려 한다.



+잔 생각)

자아 밖에 있는 세계는 실재하더라도 그 존재 자체의 originality를 우리는 알 수 없다. 우리가 인지하는 세계 또는 타자는 우리의 감각을 통해 인지되기 때문이다. 마치 동굴의 우상처럼. 나는 가끔 일을 하다가 동굴의 우상, 플라톤이 말한 그림자를 경험한다. 엑셀에서 Vlookup을 많이 거는데, 사전작업으로 원본 바코드 데이터 옆에 text함수를 건 셀을 추가한다. 그리고 text형식으로 변환한 데이터를 통해 vlookup을 수행한다. 이럴 때면 나는 '동굴의 우상이 이런 것이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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