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시대, 죽음이 일상에 침투했다. 너무 자주 죽음이 들리고, 너무 많은 죽음이 보인다. 생각해보면, 이전부터 우리는 어떤 죽음으로 생을 이어가고 있으며, 어떤 죽음에도 불구하고 삶을 지속하고 있었다. 무뎌짐이 길어져 더 늦기 전에 죽음에 대해 생각해볼 때다. 보이지 않았던, 들리지 않았던 죽음이 어둠에서 나와 모습을 드러낸다. 잊혀진 죽음들과 감춰진 죽음들, 그리고 나의 죽음까지도.
죽음 자체는 슬픔이 없다. 죽음은 중립적이다. 모든 죽음은 안타깝지만, 슬픈 죽음은 관계에서 온다.관계가 없는 죽음을 진정 슬퍼할 수 있을까? 내가 애지중지 키운 화분이 죽으면 슬프지만, 모르는 나무의 죽음은 안타깝다. 내 지인이 전하는 부고 소식은 슬프지만, 모르는 이의 부고는 안타깝다.슬픔은 다양한 언어로 표현되지만 안타까운 마음은 "유감입니다(I'm sorry)"로 전달된다. 내가 알고 모르고, 나와 맺은 관계의 깊이에 따라 슬픔의 크기가 다르다. 너무 많은 슬픔들을 감당해낼 수 없기에, 어쩌면 우리는 애써 보지 않으려 하고 애써 무뎌지려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가끔은 세계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죽음을 직시해볼 필요가 있다.
[ 사사롭지 않은 과학과 그렇지 않은 죽음_과학 측면에서의 죽음 ]
- 과학의 매력은 '사사롭지 않다'는 거예요. 빌딩에서 돌이 떨어지는 것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떨어지는 것은 내겐 완전히 다른 사건이지만 지구는 그것을 똑같이 받아들여요. 그래서 냉혹하지만 그런 사실을 아는 순간 인간도 사사롭지 않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요. 내가 특별하다는 사고에서 벗어나고 운이나 재수 같은 것에 연연하지 않게 되고요.
- 죽으면 육체는 먼지가 되어 사라집니다. 하지만 원자론의 입장에서 죽음은 단지 원자들이 흩어지는 일입니다. 원자는 불멸하니까 인간의 탄생과 죽음은 단지 원자들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은 죽지만, 그 사람을 이루고 있던 원자는 우주에서 불멸해 땅이나 꽃, 하늘의 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한결 마음의 위안을 얻게 되죠.
<질문이 답이 되는 순간>
과학은 가치중립적이다. 그래서 과학에는 슬픔이 없다. 죽음 역시 하나의 현상이며 생명의 소실에 지나지 않는다. 냉혹하지만 모든 죽음은 과학 앞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주인공인 나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나로 태어난 이상 다른 주인공의 시점에서 세상을 보기 어렵다. 전지적 나 시점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사사로운 삶을 산다. 내가 특별하고 내가 중요한 삶이다. 그렇기에 사사로운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다른 의미로 냉혹하지만, 모든 죽음이 내게는 동일하지 않다. 그로 인한 슬픔의 양도 다르다.
휴가기간에 할아버지의 제사가 껴 있었다. 코로나로 인해 가족들이 전부 모일 수 없어 각자가 할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추억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래서인지 죽음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삶의 유한성에 대해 자각했던 나의 첫 번째 사사로운 죽음. 할아버지를 많이 닮았고 할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나는 큰 상실감을 느꼈다. 더 이상 대화할 수 없고 더 이상 만질 수 없다는 사실이 와닿지 않았다. 크기를 알 수 없을 만큼 슬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에 돌아와 삶을 살아가야 했다. 그렇게 일상에서 슬픔은 흩뿌려졌다. 그리고 가끔 할아버지의 기억 조각들이 머릿속에서 재생될 때면 생전에 할아버지께서 주셨던 격려와 사랑을 옅게나마 느낄 수 있다. 원자 단위로 돌아가 이 우주 어딘가에서 나와 함께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는 과학의 사사롭지 않은 위로가, 나는 고맙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언젠가는 별이 될 것이고, 나 역시 흙이 될 것이라는 사실. 삶이 유한하고 그 끝남이 언제가 될지 모른다는 숙명.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져 죽음에 무뎌진 일상을 살다 보면 그 사실과 숙명을 까먹게 된다. 맘껏 사랑하며, 나 스스로를 아껴주고 응원해주기에도 모자란 시간들을 그렇게 흘려보내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을 대개의 인간은 죽음에 가까워져서야 생각이 난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맘껏 살기로 했다. 기본적 자립을 유지할 수 있는 한에서 하고 싶은 것, 표출하고 싶은 것, 배우고 싶은 것, 사랑하고 싶은 것들에 용기를 내기로 했다. 잊지 않기 위해 종종 흙을 밟고 별을 봐야겠다.
그렇게 휴가 때 나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그리고 나의 죽음을 생각했다.
[ 불편함의 외주화_경제 측면에서의 죽음 ]
- 자본주의에 죽음은 없다. 지속적인 성장과 풍요의 약속이 있고, 모든 재화와 서비스는 변함없는 내구성과 영속성을 보장한다. 인간의 노화와 죽음까지도 병원과 장례식장이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처리를 통해 이용자들을 슬픔에서 빨리 벗어나게 해 준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우리가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지 않고, 느끼고 싶지 않은 것을 느끼지 않는 동안 우리는 죽음의 필연적 도래를 망각하고 끝과 소멸에서 깨달을 수 있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다. 자본주의의 친절을 방해해 죽음이라는 탐탁지 않은 대상과 마주해야 하는 이유, 그것은 나와 타자, 나와 세계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어떤 의미를 갖는지가 죽음을 통해서야 비로소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끊임없이 물건이 생산되고 기존의 것이 새 것으로 대체되며 죽음 또는 공백이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휴가 기간에 핸드폰이 고장 났다. 통화와 사진 촬영, 음악 듣기 등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 불편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런저런 조건을 따지지도 않고 그냥 새 핸드폰을 사버렸다. 자본주의 시대에 공백기란 없다. 모든 것이 즉시 대체가 가능하다. 불편함을 견디는 시간도 짧아졌다. 우리는 돈만 있으면 그 불편함을 금방 해소하고 유쾌하지 않은 상황을 바로 벗어날 수 있다. 자본주의는 공백기와 죽음을 허용하지 않는다.
미시적으로 보면 자본주의는 의도적 죽음을 생산한다. 신제품에 대한 수요는 두 가지 경우에 창출되는데, 한 가지는 현재 소유한 제품의 수명이 다 할 때이고, 나머지 한 가지는 기존의 것과 완전히 차별화된 신제품이 나올 때이다. 이미 기술과 품질, 디자인이 상당히 좋아진 상황에서 기업들이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제품의 수명을 의도적으로 줄이는 것이다. 더 오래갈 수 있는 제품도 3~4년이면 대체하도록 적정 수준의 품질을 유지해 필요 이상의 소비를 촉진시킨다. 의도된 죽음이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보면, 자본주의는 불멸을 상정한다. 끊임없이 생산되고, 끊임없이 대체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멈춤과 죽음을 온전히 느끼기 어렵다. 공백을 느낄 여유는 허락되지 않는다. 자본만 있으면 소비, 사용, 편리, 심지어 생명의 불사를 누릴 수도 있다. (현재 인류 영생불멸을 꿈꾸는 호모데우스 프로젝트가 실리콘밸리에서 진행 중이다.)
이전에는 사람이 죽으면 장례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장례 이후 추모하는 기간까지 고인을 충분히 생각하고 추억할 수 있었다. 그만큼 슬픔과 불편한 과정이 길었다. 하지만 이제는 시장에서 장례의 많은 부분을 대신해주고 시스템화 되어 슬픔을벗어나기까지의 기간이 짧아졌다. 불편의 최소화, 고통의 완화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인간으로서 온전히 느끼고 자각할 것들을 통제하고 숨긴다면 그것은 어쩌면 다른 의미에서의 '상실'일 수 있다.
더 나아가, 많은 가공식품들을 거리낌 없이 소비할 수 있는 것도 자본주의의 은총(?)이다. 가공육의 경우 우리는 깔끔하게 가공 처리된 소시지와 햄을 거리낌 없이 소비한다. 그러나 그것이 생산되기까지는 돼지의 털이 타서 벗겨지고 가죽이 벗겨지고 발골되는 과정을 거친다. 영화에서 피가 나오는 장면을 보고 고개를 돌리는 많은 사람들조차도 이 불편한 과정이 생략된 가공육은 별 무리 없이 맛있게 먹는다. 불편함을 외주화 한 결과 우리는 편리함을 누리고 아름다운 것들만을 보며 살아간다. 자본주의는 이런 측면에서 우리에게 축복일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현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 과연 옳을까?라는 의문을 종종 갖게 된다. 잠재적 또는 현실의 문제-사실 영원불사란 허상이며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한 끝없는 대체와 죽음이 숨어 있음-를 은폐한 채 지금의 내가 행복하게 살면 됐지라는 태도로 일관할 때 어떠한 미래를 맞게 될지 우려스럽기도 하다.
불편함의 외주화, 편리함의 불사. 이것은 식품뿐만 아니라 환경 그리고 사람에게도 작동하고 있는 자본주의 방식이다. 우리 자체도 대체부속품이 되어가며, 소비자의 편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안 보이는 곳에서, 안 보이는 시간대에 서비스를 창출하는 노동자의 노고는 은폐되고 인권은 존중받지 못한다. 점점 이런 현상이 심화될 것이다. 결국은 자본주의에 의해 우리 마저도 사물화 되고 있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탐탁지 않은 과정과 불편함을 마주하고 견디는 연습을 의도적으로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람됨을 사수하기 위한 노력으로 말이다.
이번 글을 맺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2주를 꼬박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약간은 우울하고 불편해지는 시간이었다. 그동안 애써 외면하려고 했던 부분들도 들춰내 보는 용기를 가져야 했다. 죽음은 아마 죽을 때까지 익숙해지지 않을 것이고 경험하지 않으면 모르듯 살아있을 동안은 짐작으로나마 이해할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의도적으로 불편함을 느끼려는 시간을 통해 옳음에 대한 나만의 기준과 나의 인생 방향성에 대해 좀 더 예민해질 수 있었다. 무뎌진 삶이 행복하다고 착각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종종 불편한 감정을 돌이켜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