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은 그랬다.
그저, 너무 어린 나이에 혼자가 됐으니
마음 맞는 사람과 살포시 연애라도 하며
그냥 가볍게,
남는 시간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그런 가벼움을 원했다.
상대가 진지하게 연애를 고려하거나,
혹은 결혼을 전제로 연애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면
나는 단언컨대 그 사람과의 관계를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연하 남자 친구는 회사 동료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주변 사람들의 소개팅 제안을 단칼에 거절해왔다. 본인은 철저히 비혼주의라고 심심치 않게 말해왔다.
그래서 이 만남이.
이 사람, 이 사랑이 나는 부담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은 반갑기까지 했던 게 솔직한 마음이다.
너 비혼주의랬잖아.
나 역시 결혼할 생각이 없잖아.
그러니 그저 가볍게 데이트하며 만날 뿐인데
왜 굳이 나의 아픈 과거를 드러내어
자존감을 떨어뜨리고 눈치를 보고 해야 하는 거냐고.
나는 너무나도 이기적인 마음이었고
더이상 남자때문에, 사랑때문에
나의 인생을 손해보고싶지 않았다.
생각해봐.
만약 이 남자랑 만나다 헤어지게 됐을 때
근근이 벌어먹고사는 나의 직장은 어떻게 되는 것이며 내가 과연 이 회사에 다닐 수 있기나 한 건지
나는 그저 두렵기만 했다.
그래서 나는 너무도 당연하게
나의 이혼 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부치려고 다짐했다.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거야.
조용히 만나다가 조용히 헤어지면
나는 그냥 나이 많은 비혼주의 여성으로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콧대 높고 조금은 우아한, 기품 있는 여자로 남을 수 있겠지.
그저 그렇게 생각했다.
앞서 말했듯, 내가 살고 있는 조그만 1.5룸 오피스텔에는 내 심장, 내 아들의 사진이 도배되어 있다.
우리 집에 남자 친구를 데려오면서
내 아들의 사진을 떼거나 치울 생각은
먼지 한 톨만큼도 없었다.
그러니 그가 우리 집에만 오지 않는다면,
혼인관계 증명서를 발급받지 않는 이상
내가 이혼녀라는 사실은 알 수가 없다.
정말이지 그랬다.
얼마나 이 사람과 만날지 알 수는 없지만
끝까지 숨길 생각이다.
절대로 알리고 싶지 않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 남자는 나에게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준다.
나를 너무나도 진심으로 대한다.
나를 바라보는 꿀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눈빛,
나를 만지는 손가락 하나하나의 손놀림,
나를 조심스레 부르는 나지막하고 다정한 목소리.
어느 것 하나도 진심이 깃들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데 이 남자가 자꾸만 나에게 본인이 부족하다는 말을 한다.
가진 거라곤 불알 두쪽뿐이라
너희 부모님이 나를 마음에 들어 하실지 모르겠다며
혼자 김칫국을 들이마시고 있다.
너 분명 비혼 주의라고 했잖아.
너는 평생 혼자 살 꺼라고, 연애만 할 거라고 했잖아.
내 몸속 어딘가 한구석에 조그맣게 자리한 양심이
끊임없이 아파온다.
거짓말이 제일 싫다고 말하던 나란 인간은
거짓으로 똘똘 뭉쳐있다.
거짓이 거짓을 낳고
사랑이 거세어지는 만큼 나에게 남아있는 양심은
참아낼 수 없을 만큼 큰 통증을 낳는다.
그런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나를 바라보는 저 그윽한 눈빛이 경멸이 되어 돌아올까 두렵다.
천박하고 가증스러운 인간이라고 나에게 손가락질할 것이 두렵다.
짧은 시간 나를 촉촉이 적셔낸 그의 사랑이 떠나는 것이 두렵다.
저런...
그렇게 남자에 데이고도 나는 이내 사랑이 아쉬웠고 목말랐나 보다.
참으로 한심해.
나 사실은 이혼했고 6살짜리 아들이 있어.
이 말이 차마 목구멍 너머로 나오지 못하고
침과 함께 삼켜진다.
그리고선 말했다.
나 사실 되게 나쁜 년이야.
아주 쓰레기 같은 년이야.
내 남자 친구는 남의 사생활을 캐묻지 않는다.
꼬치꼬치 상대방의 기분을 묻거나
이유를 반문하지 않는다.
그냥 묵묵히 듣고만 있는 그냥 그런 나무 같은 사람.
어느 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자기 전 통화를 한다.
11시쯤 되었을까.
감상에 젖어서인지,
아니면 오늘도 변함없이 나를 너무도 소중히 여겨주며 자신의 진심을 한껏 내어놓는 이 남자에게
더 이상의 죄를 짓고 싶지 않아서였는지
이유는 모르겠다.
넌지시 또 한 번 말한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야.
나는 아주 나쁜 사람이야.
몇 번의 예고를 때려 그런지
남자 친구가 오늘은 물어온다.
자기, 혹시 유부녀야?
아니...
그럼 자기 혹시 빚 있어?
아니... 카드값은 조금 있지만... 빚쟁이는 아니야.
자기 혹시 애 있어?
...
(오랜 침묵 후)
나 여섯 살짜리 아들이 있어.
그리고 전에 결혼했었어.
2년도 채 못 살았지만 나 결혼한 적 있는 이혼녀야.
그동안 목구멍에 맺혀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그 문장이 그 밤, 진실을 말하라는 동그란 달빛 아래 나는 더 이상 비밀을 간직하지 못하고 눈물과 함께 감추었던 비밀이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눈물이 날 수가 없다.
더 이상 목소리도 나오지 않을 만큼 눈물이 흘러
목을 막는다.
미안해...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수화기 너머로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가 지금 갈까?
우리 얼굴보고 얘기해.
남자 친구가 사는 곳은 우리 집에서 택시를 타면 만원이 조금 넘는 거리이다.
통화를 마치고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정리할 새도 없이 꺼이꺼이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린다.
그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