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도 때가 있다

젊은 날의 특권

by 안개꽃





오랜만에 버스를 타고 약속 장소로 나가는 길.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걸까, 햇살 참 따뜻하다.’ 그렇게 잔잔한 강물 위로 반짝이는 물결에 ‘첫사랑’이란 단어를 보았다.

첫 연애를 시작조차 해보지 못한 스무 살 무렵의 나는, 연애 꽤나 했던 혹은 하고 있는 친한 동기 언니들에게 사랑을 종종 묻곤 했다.
그 시절의 나는 ‘사랑을 귀동냥으로 배웠어요’ 수준이랄까.

그 당시 나는 첫사랑의 환상이라고 해야 할지. 첫사랑은 로맨스 소설 혹은 영화처럼 특별할 거라고 어렴풋이 상상했다.
“첫사랑은 처음 사랑한 거예요? 아니면 처음 사귄 거예요?”


그럼 누군가는,

“첫 연애지.”

“아니야, 처음 한 사랑이지. 짝사랑 포함해서.”

“첫사랑이라고 느낌 오는 사람!!”


이렇게 첫사랑의 정의는 저마다 달라서,
"그래서 어떤 게 첫사랑인 건데?"

답 없는 물음을 두고 오래간 고민 했던 적도 있다.

아직도 나는 첫사랑의 정의를 내리지 못하겠다. 내가 17살에 했던 눈물 나게 시렸던 짝사랑이 첫사랑인지. 20대 초반에 연애를 해봐야 할 거 같아서 어렵사리 시작했던 첫 연애가 첫사랑인지. 그도 아니라면 나를 잘 알 수 있었던 가장 길었던 연애가 첫사랑인지.

다만. 첫사랑의 정의가 무엇이든 간에, 여러 모양의 사랑이 모여 지금의 나를 채워간 것임은 분명하다.
그 덕분에 나의 성향이 어떠한지, 내가 어떤 성향의 사람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니면 내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성향의 사람이라던지.
사랑과 연애만큼 사람을 그리고 나를, 빨리 알게 해주는 것은 없다. 그것도 아주 깊이.

그런 의미에서 사랑의 경험이 많지 못했던 나의 젊은 날에 아쉬움이 남는다.
더 많은 이성을 만나보지 못해 아쉽다기보다, 사랑을 통해 사람(나를 포함)의 본질을 더 깊게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 기회를 날린 것 같아 조금 아쉽다고 얘기하는 편이 맞겠다.
다양한 사랑도 연애도 젊은 날의 특권임을, 너무 뒤늦게 깨달아버린 거겠지.

사랑과 연애는 감정 낭비 혹은 시간 낭비라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잠깐이나마 있었다.
“어차피 헤어지면 그만이잖아. 헤어지면 소중했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잖아. 그럴 거면 애초에 시작도 안 하는 게 낫지.”
솔직히 말하면 20대 초반부터 중반까지는 이런 생각이 더 지배적이었다고 말하는 게 맞을 듯하다. 음, 뭐랄까. 막막한 미래에 내가 뭘 하면 좋을지 고민하기도 바쁜데, 누군가를 사랑하며 시간을 쓰고 에너지를 쏟는다는 게 부질없다고 느꼈다.

마치 사랑에 덤덤했던 사람처럼 말하고 있지만, 나는 첫 연애를 짧게 끝맺고 그 후폭풍으로 위무력증을 겪었다. 덕분에 몸무게가 38킬로까지 빠져버렸다. 부모님은 어느 날 갑자기 딸에게 이유도 모르게 찾아온 위무력증 때문에 매일을 노심초사하셨다.


난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다. 그 시절 나는 음식을 거의 먹지 못했고 기운이 없어 하루 종일 누워 지냈다. 누워만 있는 나에게 벌어질 새로운 일 따위는 없었으니까 하루가 굉장히 길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때가 다른 시절보다 몇 곱절은 더 길게 내 인생에 그려진 듯하다.

“내가 그와 엄청 대단한 연애를 한 것도 아닌데. 나 참 유난스러운 사람인가 봐.”
‘꼴랑 5개월 남짓 연애해놓고, 이게 말이 돼?’ 싶어서 정말 이별 때문에 아픈 게 맞기는 한 걸까. 스스로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래서 적다면 적은 나의 사랑 경험은, 나를 지키고 싶은 자기 방어에서 비롯된 게 아닐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짝사랑을 하며 겪는 가슴앓이도, 연애 후에 겪는 이별의 아픔도 내게는 너무 아팠던 거다. 또다시 내 마음이 다치는 게 싫어서 사랑의 감정이 자라지 못하도록. 감히 사랑 그놈이 얼굴을 들지 못하도록 가슴속 깊이 눌러두었던 것 같다.

그런데 서른을 넘기고(정확히 말하면, 결혼을 하고) 나의 젊은 날을 돌아보며 가장 후회스러운 것은, 대학 시절 쓸모없는 학점을 너무 잘 받았다는 것. 그 당시에 내가 가장 열심히 해야 했던 것은 그게 아니었는데. 나는 바보같이 A+를 받기 위해 매일을 과제와 씨름하며 살았다. 높은 학점은 나란 사람을 절대 윤기 나게 만들어주지도 못하는데 말이다.

젊은 날의 나는, 청춘의 특권으로 더 뜨겁게 사랑했어야 했다. 내 앞에 있는 그가 내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첫사랑인 것처럼. 그렇게 사랑을 하며 더 아프기도 해 보고. 사랑의 경험으로 나를 조금 더 깊이 채워갔었어야 했다.
그 나이 때에만 할 수 있는 게 있는 법이니까.

충분한 사랑을 받은 경험도, 아낌없는 사랑을 준 경험도 우리에겐 더없이 소중한 기적이다.
공부에만 때가 있는 게 아니고, 사랑에도 때가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훗날 내 딸이 스무 살이 되면 이 얘기는 꼭 해줄 작정이다.

우연히 길에서 만난 윤슬 덕분에, 오늘도 어쩌다 보니 ‘어쩌다 사랑’.




사랑 한 스푼. 문득 그리운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