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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잠 Oct 20. 2021

시작 소년단

남고의 진정한 마이너, 문예부의 모든 것

  3년 가까이 다닌 회사를 그만두고, 나는 한 대학의 사범계열에 편입했다. 벌어둔 돈을 쪼개서 쓰는 20대 후반의 대학생활은 영 넉넉하지 못했지만, 대학 내의 사람들과 새로운 공부가 적성에 맞아 내 선택을 후회하진 않았다. 직장생활을 제외하고, 합이 7년 간의 대학생활을 마치자 나는 서른이 돼있었다. 새로운 결단이 필요한 시기라 생각했고, 나는 10년의 서울 생활을 뒤로한 채 한 바닷가 마을의 남고에서 기간제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소심한 성정의 초보 교사가 남자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이 처음엔 겁도 났다. 그래서 존재하지도 않는 카리스마를 짜내어 아이들을 기선 제압하기 위해 작은 잘못에도 크게 호통치거나 나의 기준에 아이들이 부응해주기를 바라며 부담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지나친 긴장과 경계의 태도는 금세 나를 삐걱거리게 만들었고, 그걸 아이들이 누구보다 먼저 알아채고 있었다.

  다른 선배 교사들을 따라 하는 것을 그만두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강력한 포스는 없지만 다정하고 친근한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내어 보이자 그제야 아이들과 제대로 소통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내 나름대로 분투하며 남고에 적응해갔다.




  2년을 근무했던 그 학교에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업무는 문예부 담당교사 일이었다. 사실 문예부는 연말에 시화전과 시 낭송제, 문집 발간까지 소소하게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았고, 주말이면 각종 글짓기 대회에 아이들을 인솔해가야 하기 때문에 선생님들 사이에서는 기피하는 동아리였다. 그래서 신참인 내가 문예부를 맡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손이 많이 가는 그 일들이 싫지 않았던 것은 문예부에 모이는 아이들의 사랑스러운 면면 때문이었다.


  남고에서 동아리 활동으로 문예부를 택하는 아이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첫째, 정말로 문예창작에 뜻이 있는 극 극소수의 감성 장인들.

  둘째, 동아리 선택 때 가위바위보에 져서 할 수 없이 왔거나 딱히 하고 싶은 게 없는데 문예부 가면 탕수육을 사준다는 소문에 현혹된 아이들.

  이유야 어쨌든 두 부류 모두 대입에 적합한 생활기록부를 꾸미기 위해 동아리까지 신경 쓰는 수많은 고등학생들과는 다른 진정한 마이너들이었다. 언제부턴가 시를 쓰는 게 지질한 일로 치부되는 남고생들 사이에서 문예부의 간판 아래 모인 이 마이너들은 그래서 동질감이 있었고, 점차 묘한 자부심까지 생겨나곤 했다.



  내가 문예부 아이들에게 붙인 이름은 '시작 소년단'이었다. 시를 짓는 일(詩作)을 시작(始作)해보자는 의미였다. 마음에 드는 시 찾기부터 노래 가사 개사하기, 모방 시 짓기, 릴레이 소설 쓰기 등등의 단계를 밟으며 아이들은 숨겨왔던 재능을 반짝거렸다.

  한 아이는 점점 머리숱이 줄어드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머리에 생각의 우물을 이고 있는 사람에게 쉼표를 놓아드리고 싶다.'라고 썼다. 또 다른 아이는 친구네 문방구의 일상을 그려내며 '문방구 위의 달이 연필처럼 깎이어 간다.'라고 썼다. 아이들이 쓰기 전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말이었다. 이렇게 따뜻한 언어가 생겨나는 순간을 볼 수 있다는 건 무척이나 근사한 일이었다.



  주말에 아이들을 인솔해서 글짓기 대회에 나가면 주제를 받은 아이들이 해송 숲 여기저기에 엎드려 시나 수필을 썼다. 그동안 나는 멀찍이 떨어져 한참을 고심하는 아이들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행사 주최 측에서 전시해놓은 시화들을 구경했다. 평생학습관 문해반에서 글을 배우는 어르신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일이 많았는데, '오늘은 비가 와서 배추밭에 안 나가고 된장국을 끓여먹었다.'라거나 '다정했던 남편이 그립다.'라거나 '칠십 평생 글을 배우러 다니는 일이 제일 좋다.'라는 짧은 글에 매번 나는 조금씩 울었다.

  그러다 대회가 끝나면 우리는 꼭 인근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먹었다. 학교에서 나오는 식비는 딱 짜장면 값밖에 안 됐기 때문에 몰래 내 카드로 탕수육을 계산해서 아이들과 나는 배부른 점심을 먹었다. 그런 하루가 좋았다.




  살다 보면 바쁘고 정신없고 고된 날들이 많다. 그런 하루 어딘가에 해송 숲에서 어여쁜 말을 떠올리려 몰두하는 소년들의 옆얼굴을 기억해볼 수 있다는 것이, 이문재 시인을 좋아하는 학생의 이름을 안다는 것이, 여러 번 지우고 다시 쓴 연습장 위의 자작시를 내게 내밀던 손의 떨림을 헤아려본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모른다. 이제는 소년에서 어른이 된 '시작 소년단'이 오늘은 어떤 시를 마음에 품고 하루를 보낼지 안부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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