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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잠 Oct 21. 2021

너는 깍두기가 아니다.

깍두기라는 말이 담지 못하는 너라는 의미

  어릴 적 언니 뒤를 졸졸 따라나서면 동네엔 언니 또래 친구들이 꽤 여럿 있었다. 술래잡기나 사방치기 같은 언니들의 놀이에 나도 끼고 싶었지만, 내 놀이 실력은 언니들과 견주기에 현격히 부족했다. 하지만 인정 많은 언니들은 나를 내치지 않고 '깍두기'라는 이름으로 놀이판에 끼워주곤 했는데, 나는 깍두기가 되는 게 좋았다. 흙바닥에 그어놓은 선을 밟아도, 깨금발로 제대로 못 뛰어도, 얼음땡을 늦게 외쳐도 한 번씩은 봐주는 그 너그러움이 좋아서 언니가 나를 떼어놓고 놀러 나가려 할 때도 끈질기게 따라가 깍두기 한 자리를 차지하곤 했다.



  깍두기가 꼭 놀이판에만 있는 건 아니다. 상황이나 관계에 따라 사정을 좀 봐주게 되는 깍두기를 만나기도 하고, 과거의 어느 시점을 회상해보면 누군가에게 내가 깍두기였구나 싶을 때도 있다.




  깍두기라는 말을 생각하면 매번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준이는 내가 작은 도시의 남고에서 기간제 교사로 근무할 때 가르치던 학생 중 하나였다. 선수를 목표로 쭉 운동을 해왔던 준이는 여러 상황이 맞물려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면서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 때를 가리지 않는 장난에 '초딩이냐?'라는 반 친구들의 핀잔을 자주 받았고, 필터링 없는 자기표현 덕분에 선생님들의 훈계와 벌점을 몰고 다니는 아이였다.


  나도 은연중에 준이를 사고뭉치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다 학년이 바뀌고 본격적으로 준이의 수업을 맡게 되면서 그제야 준이를 가만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운동만 했던 아이라 학습에 대한 기초도 흥미도 없다 보니 수업시간이 준이 입장에서는 곤욕이었고, 잠이 들지 않으면 뭔가 떠들기라도 해야 그 시간을 버틸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나는 준이를 '깍두기' 삼기로 했다. 먼저 나와 반 친구들이 함께 합심해 준이를 귀여워해 주자고 분위기를 만들어갔다. 수업에 들어가면 '준이 오늘 기분이 좋네?' 하면서 먼저 말을 걸었고, 자꾸만 엎드려 잠이 들려는 준이를 깨워 교과서 읽기를 시키고 조금만 읽어도 잘했다고 칭찬을 해줬다. 수업시간에 관계없는 질문도 준이가 물어보면 짧게라도 꼭 대답을 해주고, 자연스럽게 수업으로 돌아오는 방법도 터득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정말로 준이가 귀여워 보이기 시작했고, 준이도 내 수업을 편안하게 여겼다. 나도, 준이도, 반 친구들도 우리의 수업에 잘 적응해가는 것 같았다. 깍두기 요법은 꽤 쓸모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고 학생을 찾습니다.'

  지역 SNS에 글 하나가 올라온 것은 겨울이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작성자는 지역대학에 다니는 학생이었다. 버스를 타고 가던 중 한 행인으로부터 원치 않는 추근거림을 당했고, 기분이 나빠 버스에서 내리려는데 자신을 따라 내리려는 그 행인 때문에 시비가 붙었다고 했다. 두려움을 느끼던 와중에 한 고등학생이 '우리 누나한테 왜 그러시는데요?'라며 지인인 척 행인의 앞을 막아섰고, 덕분에 그 상황을 무사히 빠져나왔다는 이야기였다. 교복을 보니 ○○고 학생 같다며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는 말도 덧붙였다.



  작성자가 찾는 주인공은 준이였다. 모두가 그랬듯 나에게도 준이는 뜻밖의 인물이었고, 대견한 일을 했다며 칭찬을 건네는 내게 아무 일도 아니라며 쑥스러워하던 준이의 표정이 여전히 선명하다.



  내가 틀렸음을 인정해야 했다. 내 마음속에서 준이는 깍두기와 동의어였고, 그 말속에는 준이를 다정하게 품어보자는 의도와 함께 준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부족하다는 판단이 들어있었다. 깍두기로 명명된 준이는 교실 안에서 더 이상 성가신 존재가 아니었지만 그뿐이었다. 타인을 향한 배려와 용기를 갖춘 사람에 대한 기대와 존중을 주지 못했다. '내가 너에게 대체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까?' 나는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준이가 부족한 교사인 나를 봐주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 당시 우리 반의 급훈은 '넌 머지않아 예쁜 꽃이 될 테니까'였다. 박치성 시인의 시구였고, 내가 아니라 아이들이 정한 것이었다. 그 누구도 깍두기 일리는 없다고, 교사와 학생이라는 가름 너머 우리들은 꽃이 되어가는 중이라고 아이들이 내게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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