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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잠 Oct 24. 2021

죽음을 선고하는 자의 예의

그 순간 최선의 위로에 대하여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보면서 생과 사가 교차되는 일이 우리의 일상에 얼마나 밀접한가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때가 많았다. 사고로 혹은 병으로 죽음을 앞둔 환자와 가족들에게 의사가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다.'라고 말하는 장면 뒤에는 오래 마음을 쓰는 의사의 근심 어린 얼굴이나 눈물이 비치기도 했다. 그래서 의료진은 의술뿐만 아니라 공감을 나누는 이들임이 두드러질 때 드라마의 감동이 샘솟곤 했다.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드라마 속 상황과 같은 위치에 서 본 적이 있었다.

  4년 전 겨울, 엄마는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그저 한쪽 다리가 계단을 오르내릴 때 자꾸 불편하고, 기억력이 감퇴되는 증상을 느낀다고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의사의 입에서 처음 들어보는 병명이 나왔다. 백만 명 중 한 명 꼴로 나타나는 희귀병으로 현재까지 밝혀진 치료법은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난치병이 아닌 불치병이었다.



  엄마도, 보호자로 곁에 섰던 나도 이 상황을 단번에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남아있는 연차를 몰아 쓰며 엄마의 손을 잡고 서울의 내로라하는 병원들을 차례로 찾았다. MRI를 몇 번을 다시 찍고, 수많은 검사를 반복해도 병명은 달라지지 않았다.


  엄마를 대신해 보호자인 내가 몇 번이고 시한부 선고를 받아야 했다. 대형 종합병원의 경우 그 분위기는 거의 같았다. 진료실에서 또는 복도에서 내게 엄마의 병명을 말하는 의사들은 담담하고 차분했으며 절차에 따라 업무를 처리하는 사람 특유의 간결함이 있었다. 혹여 다른 가능성은 없냐고 묻는 내게 엄마의 시간이 오래 남지 않았음을 간단히 재확인시킬 뿐이었다. 공기가 침울했을 뿐 감정이 담긴 말에서 느껴지는 무게는 없었다.



  엄마의 병세가 악화되며 나는 적지 않은 수의 의사들을 마주했다. 엄마의 입원을 위해 상담했던 한 병원에서는 '어차피 소생의 가능성이 없으니 입원은 무의미하다. 우리에게 그런 자리는 없다.'라는 냉정한 거절을 받았다. 어쩌면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수없이 받아왔던 거절이었다. 하지만 내게 상처가 될 만한 단어를 애써 숨기지 않고 눈앞에 툭툭 던져놓는 무신경함이 어떤 거절보다도 속을 다치게 했다.



  엄마는 1년이 안 되는 투병기간을 거쳐 한 요양병원에서 돌아가셨다. 엄마가 숨을 거두던 그 순간, 주체할 수 없는 슬픔 속에서도 사망선고를 하던 의사의 말투와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하냐며 허둥대는 내게 그는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연명 치료하지 않겠다고 서류에 사인하셨잖아요. 뭐 해드릴 게 없네요."

  그리고는 터지는 울음소리 틈에서 재미없는 책의 구절을 읽듯 현 시간과 사망 사실을 들릴 듯 말 듯 읊어주고는 몸을 돌려 병실을 나갔다.


  요양병원에서 환자가 사망하는 일은 흔하디 흔한 일상일 것이다. 늦은 시간 당직을 서느라 피곤이 몰려왔을 것이고, 어쩌면 그날이 그에게 최악의 하루여서 타인에게 세심함을 쏟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우리 가족만큼 최악의 하루를 보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유가족의 슬픔을 덜어주려 애쓸 필요까지는 없어도 죽음을 목도하는 이의 엄숙함쯤을 갖출 수는 없었을까.




  엄마가 입원하기 전 검사를 받고 주기적으로 약을 처방받았던 작은 신경외과병원이 있다. 처음 엄마의 병을 진단할 때 '아이고, 이러면 안 되는데'를 연발하며 한참을 뜸을 들이다 병에 대해 설명하던 의사의 조심스러운 태도가 눈에 보였다.


  엄마의 거동이 어려워진 후, 나 혼자 몇 번 병원을 방문할 일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보다 더 울상으로 나를 맞이하던 의사였다. 두툼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둥그런 안경을 썼다 벗었다 하며 나의 처지를 위로할 만한 적당한 말을 찾던 그의 모습이 늘 마음에 남아있다.

  그는 몇 해 전 암으로 돌아가셨다는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를 내게 해주었다. 당장 눈앞에 온 이별을 받아들여야 하는 어려움에 대해, 이별 후 마음을 추슬러 갔던 자신의 시간들에 대해 경험을 나눠주며 엄마의 투병 기간 내내 엄마의 보호자로만 살았던 나를 다독여주었다. 그리 길지 않았던 그 대화가 내게는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토록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마음을 기울이는 의사를 만났다는 것에 대해, 누군가가 보내주는 위안을 온전히 받을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 그 마음 씀을 잊지 않는 것은 살아가는 날들 동안 나의 빚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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