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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정 Mar 04. 2021

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에 담긴 애틋한 사랑

한 장 한 장 읽을 때마다 앞으로 읽어야 할 부분이 줄어드는 게 너무나 아쉬운 책을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박완서 작가님 10주기를 맞이해서 출간된 에세이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에세이 한편 한편 읽어가며 눈물이 핑돌고, 마음이 찡하고, 다가온 문장들은 사랑 그 자체였습니다.

박완서 작가님 책을 어릴 때부터 좋아했지만, 이렇게 10주기를 맞이해 담백하면서도 순수하며 글마다 꽃이 피어있는 듯한 느낌의 책을 만나니, 아름다움을 선물 받은 듯했습니다.


특히, 시간적으로 작가님 생전, 즉, 꽤 예전에 쓰셨던 글이다 보니, 그 시대만이 갖고 있는 에피소드들을 접할 수 있어 추억여행을 하게 되었어요.

공중전화라든지, 버스 안내하는 언니라든지, 국민학교, 그리고 할머니... 나의 할머니, 우리의 할머니, 할머니의 존재. 괜히 저의 할머니도 떠올라 시큰하기도 했고요

그리고 글 속에 등장하는 순간과 비슷하게 닮았던 나의 그 어떤 시점이 떠오르게 만드는 편안함도 있었으니, 박완서 작가님 글의 마법인가 봅니다.  


그래서 책 안에서 몇 가지 마음에 크게 남았던 부분을 나눠볼까 하고요


[사십 대의 비 오는 날]이란 글은, 한 달에 한두 번 지나가다 꼭 만나는 앉은뱅이 거지에 대한 단상이었어요. 돈을 한 번도 줘 본 적 없으면서도 지레짐작으로 앉아있는 거 자체가 쇼가 아닌가 라고 생각했던 일. 속아만 살았던 사람처럼 거지조차 못 믿었던 자신.


그날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통증과 함께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누를 수 없다. 믿지 못하는 게 무식보다도 더 큰 죄악이 아닌가도 싶다(31p)

이 글을 읽으면서 떠오른 일이 있는데, 저도 초등학교 3학년인가 4학년 때 학교 끝나고 집에 가면서 거지 아주머니를 자주 만났었습니다. 제가 당시에는 방배동에 살았는데, 초등학교를 스쿨버스 타고 다녔어요. 버스에서 내리면 저희 아파트 단지까지 가는 길에 육교를 건너야 했거든요. 그 육교 중간쯤 아주머니가 앉아 계셨는데, 일주일에 서너 번은 계셨던 거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순수했던 게, 버스에서 내려 친구들이랑 막 떠들면서 집으로 가다가, 그 아주머니 앞에선 꼭 다 같이 멈춰 선 뒤 갖고 있던 동전을 탈탈 털어 드렸었어요. 그것도 아주 즐겁게! 제가 어렴풋이 기억나는 장면이 있는데, 지갑을 여니 동전이 없어서 주머니를 여기저기 뒤져 100원이 나와갖고 드렸었어요. 그것도 재밌게! 어릴 때니까 그분이 불쌍하다는 개념이나 생각도 정확치 않았는데, 그렇게 뭔가 드린다는 게 재밌고, 웃으면서 할 수 있어서 좋았었나봐요.

지금 돌아보면 그분이 진짜 거지가 아닐 수도 있거든요. 앉아있는 게 정말 쇼였을 수도 있어요. 그렇게 힘들어 보이지도 않으셨고, 그 거지 아주머니 분이 되게 밝으셨던 거 같아요. 저희랑 얘기도 하고 그랬거든요. 무슨 얘기였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어쨌든, 어릴 땐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그냥 믿고, 줄 수 있는 걸 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수하고 잘 모르니까요.

순수하게 믿는 것. 그것이 삶을 밝게 만드는 방법인듯 해요.


그리고 [언덕 방은 내 방]. 작가님이 부산에서 이해인 수녀님이 계신 수녀원 언덕 방에 묵으시는 이야기인데, 너무나 잔잔하고 따뜻하며 좋았답니다.


필요한 것이 알맞게 갖춰져 있고 홀로의 시간이 넉넉히 허락된 편안한 내 방이 언제고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아릿한 향수와 깊은 평화를 느낀다.
그 복잡한 부산에 그런 좋은 동산이 있다는 걸 누가 믿을까. 거기 언제나 갈 수 있고 또 가기를 꿈꿀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참 복도 많다 싶다.(74-75p)
 

이 글 읽고 저도 이해인 수녀님 계신 그 수녀원 어떤 방에서 묵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엄마 아빠의 고향이 부산이라, 부산은 굉장히 편안한 곳이거든요. 어릴 땐 매년 갔었고, 사실 코로나만 아니면 언제든 혼자 가서 마치 동네처럼 돌아다니다 올 수 있는 곳이랍니다. 해운대는 눈감고 다니죠. 그런데, 부산 가면 내가 편히 묵을 수 있는 어떤 방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어요. 물론 부산 가면 호텔에서 자거든요. 호텔도 어디 어디 뭐 있는지 다 알지만, 하루 자는데 비싸고, 친척집 가는 것도 이제 어른되니까 괜히 미안하고, 그렇더라고요.

언제나 갈 수 있고 가기를 꿈꿀 수 있다는 게 복이라는 구절이 참 좋았습니다. 꼭 부산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마음 편히 언제나 갈 수 있고, 가기를 꿈꿀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이잖아요.

지금 코로나 시대를 통과하며, 일상 속 작은 행복의 소중함을 많이 깨닫게 되는 듯합니다.


그리고, [행복하게 사는 법]. 작가님의 어린 시절 기억부터 자식을 키우는 이야기까지 솔직하면서도 아름답게 쓰신 글이었어요. 행복하게 사는 게 목표인 사람들. 행복하려면 어떡해야 할까에 대한 작가님의 단상


인간관계 속에서 남의 좋은 점을 발견해 버릇하면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되어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서로 사랑하게 되는 거지요 (139p)
인생이란 과정의 연속일 뿐, 이만하면 됐다 싶은 목적지가 있는 건 아닙니다.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사는 게 곧 성공한 인생입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예수님도 말씀하셨고 김수환 추기경님도 말씀하셨습니다 (139-140p)
 

행복하려면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 싸우면 하나도 행복하지 않잖아요. 미워하고 저주해봤자 나만 피곤해요. 물론 나에게 상처 준 사람, 나를 괴롭힌 사람을 어떻게 편안한 마음으로 아끼고 사랑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저 사람 저런 면도 있지, 그러며 좋은 면을 발견해가다 보면, 일상에 행복이 생기는 기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물론 저는 성인 수준이 아니라, 부족해요.

하지만, 예수님 이야기는 좋아하거든요. 너희는 내 안에 머무르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그 말씀이, 제가 까먹을 만하면 책으로, 그리고, 어떤 강론으로, 어떤 영상으로 다가오더라고요. 아마 저에게 필요한 건 사랑하는 마음인가 봅니다


박완서 작가님 에세이를 통해 사랑하며 사는 것의 소중함을 다시 마음에 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아름다운 글을 남겨주신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P.S. 그런데 책 제목이 좀 아쉽지 않나요? 저만 그런가요? 뭔가 좀 더 애틋하거나 사랑의 감정이 실린 제목이면 좋았을 텐데 싶었어요. 책 내용은 다 말랑말랑 따뜻하고 훈훈한데, 제목은 뭔가 파헤쳐보겠다는 느낌이 들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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