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의 미학으로 만드는 아름다움
“우와, 틀리는 음정과 박자가 거의 없네요. 연습을 많이 하신 것 같아요. 그런데 소리가 조금 딱딱한 느낌이에요. 특히 엄지 손가락으로 치는 이 부분이 너무 소리가 커요. 부드럽고 둥근 소리를 내도록 해볼까요?”
“둥근 소리? 그게 가능해요? 선생님은 선생님이니깐 부드럽게 잘 되겠죠. 연습한다고 한 건데 이제 지겨워서 못하겠는데..”
“악기라는 게 원래 힘들게 반복하고 반복해야 원하는 소리가 나요. 유명한 피아니스트 짐머만도 몇 마디 가지고 몇 시간씩 연습했대요.”
반복적으로 연습하는 것을 힘들어하시는 분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훈계처럼 잔소리를 늘어놓게 된다. 피아노는 열 손가락으로 건반을 눌러 소리가 난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손가락의 길이는 제각각이다. 각기 다른 길이의 손가락으로 고른 소리를 내려면 손가락마다 각각 다르게 작동시켜야 한다. 그래야 둥근 소리의 아름다운 멜로디를 연주할 수 있게 된다. 각각의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수도 없이 반복해서 연습해야 한다. 가끔 음악가는 천재성을 가지고 있어서 연습을 많이 하지 않아도 피아노를 잘 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아니다. 한 음정을 아름답게 내기 위해서 손끝이 아릴 때까지 연습을 한다. 손가락에 감각을 익히고 좋은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부단히 반복해서 연습을 해야 한다. 반복이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미술관에서 박서보 화백의 단색화를 처음 봤을 때가 생각난다. 단색화는 한 가지 색이나 비슷한 톤의 색을 쓰는 회화를 말한다. 설명이 없이 작품을 보면 그냥 한 가지 색으로 보이는 저 작품에서 도대체 뭘 느껴야 하는지 모르기 쉽다. 나도 처음엔 그랬다. 그냥 한 가지 색으로 계속 칠한 것 같은데 예술 작품이 된다는 것이 신기했다. 박서보의 작품은 수백, 수천 번 반복하는 긋기와 붓칠로 만들어내는 작품이라는 미술관 도슨트의 설명을 듣게 됐다. 그러고 나서 다시 그림을 보니 그림에서 작가의 수행의 흔적이 신성함으로 다가왔다.
“연필을 45도 각도로 잡고 하루 종일 선만 쫙쫙 그어요. 수없이 선을 밀면서 일상의 나를 비워내지요.” 어느 인터뷰에서 화백은 이렇게 말했다. 이런 수행을 통해 탄생한 작품을 치유의 힘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성실한 반복의 수행으로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런 힘든 수행의 과정이 악기 연주에도 필요하다. 때론 지겨울 때도 있고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게 만드는 이 반복의 수행을 넘어서면 좋은 소리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을 나는 보석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소리를 다듬고 다듬어 보석 같은 음악을 만들면 그렇게 만들어진 음악은 치유의 힘을 갖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선생님, 그런데 둥근 소리를 만드는 과정이 사람 사는 거랑 비슷하네요. 결혼하고 나면 남편이랑 모나게 계속 부딪히게 되잖아요. 다른 모양의 둘이 많아서 동글동글해질 때까지 부단히 노력하고 씨름하는 거지. 서로 둥근 사람이 되면 그때는 편안하게 지낼 수 있게 되더라고요.”
평생에 걸쳐 ‘병(BOTTLE)’이라는 그림을 그린 이탈리아 화가인 조르조 모란디는 이런 말을 남겼다.
“한 인간을 성숙하게 만드는 힘을 대단하고 특별한 체험이 아니라 일상을 꾸준하게 살아내는 반복 학습에서 나온다.”
반복의 미학은 예술에도 필요하지만, 삶에서도 필요한 요소이다. 수행과도 같은 반복의 과정을 거치면 보석 같은 소리를 내는 음악이 만들어진다. 이런 과정은 둥근 인생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과 같다. 일상을 꾸준하고 성실하게 살아가고, 둥근 인간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계속해서 노력하는 것은 인생을 예술 작품으로 만들 것이다.
피아노를 연주할 때 둥글고 부드러운 소리를 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박서보 화백이 성실한 반복의 수행으로 단색화를 그렸던 것처럼 성실하게 연습해야 한다. 수천 번의 반복을 통해서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게 되면 그 소리는 보석처럼 반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