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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Oct 05. 2020

똥 손인데 3년간 매일 그렸습니다.

그림 잘 그리는 아이?

나이 50에 그림을 시작했다. 꼬박 3년을 매일 그렸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에게 3년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입시를 준비하는 것만 해도 3년 이상을 매일, 그것도 하루 몇 시간씩 엉덩이에 굳은살이 박일 정도로 열심히 그려야 겨우 문턱을 넘는다. 그런 그림을 나는 하루 한 점씩 겨우 그렸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글로 쓰냐고? 똥손이기 때문이다. 평생 한 번도 제대로 그림을 그려본 적 없는 똥손. 낙서조차 하지 않고 살아온 똥손이 50줄에 들어서서 그림을 시작한 거다. 세상의 똥손들은 알 거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 작정을 한 것인지. 

그럼 이제는 잘 그리게 되었느냐, 그것도 아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다만 매일 그린 힘으로 갱년기를 무사히 넘겼고 지금은 그림을 즐기는 삶을 살고 있다. 50대 똥손의 무모한 그림 그리기 도전기를 쓰려 한다. 


 


어느 날, 그림책에 꽂혔다. 아이가 어릴 때는 엄마가 되어서 그러려니 했다. 전국에 그림책 서점이 몇 개 없던 시절이었는데 한 그림책 서점 옆으로 이사까지 했으니까. 그런데 둘째가 성인이 되던 해, 다시 그림책에 꽂힌 것이다.  

뭔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사람을 참 무모하게 만든다. 언니가 좋아서, 누워서 언니 그림을 보고 있었던 것처럼, 친구가 좋아서, 친구가 가는 곳이면 따라가고 싶어서 미술반에도 무턱대고 들어갔던 것처럼 그림의 세계로 내발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이야기를 담아내는 그림이라는 게 좋았다. 잘 그리고 못 그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도 좋았다. 사실 그게 잘 그리는 것이었지만.   

마음이 이끌면 이끌리는 대로 잘도 흘러가버리는 나는 그렇게 그림 앞에 섰다. 나이가 50인데 무슨 그림이냐 싶었다. 하지만 어차피 사는 게 다 처음이고 못하는 게 그림뿐만이 아닌데, 까짓 거 무모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림책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다고 그림까지 그리는 작가는 아니고 그림책의 글 작가가 되기로 했다. 그래도 그림을 모르고서는 글 작가가 되기 어려우니, 그림을 이해하는 수준까지만 배워보자, 똥 손이지만 평생 낙서도 해본 적 없지만 졸라맨만 면해보자, 그렇게 매일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면서 이런저런 추억이 생각났다. 아, 맞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그림으로 입선을 한 적이 있지...그것을 시작으로 그림에 관련한 일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매년 가는 소풍 장소였던 어린이 대공원에는 팔각정이 있었다. 그것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풍광이어서 그림 소재로 아주 인기 있었다. 입학한 지 한 달 정도밖에 안된 초등 1학년들의 봄 소풍이어서 그랬는지 많은 엄마들이 따라왔다. 소풍은 항상 사생대회를 겸했는데 엄마들은 아이에게 그 팔각정을 그리도록 옆에서 도왔다(고 쓰지만 거의 엄마들이 그렸다. 엄마들이 그토록 그림솜씨가 좋다는 것이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엄마가 따라오지 않은 나는 어차피 팔각정을 못 그릴 바에야 남들이 절대 그리지 않는 다른 걸 그려야겠다는 생각을 그 어린 나이에 했다. 이 생각은 이후에도 나를 언제나 남들과 다른 길로 가게 한 이정표 같은 것이 되었다. 돗자리 하나 가져가지 못한 나는 보도블록 가에 앉았고 내 옆에 서있는 가로등과 꽃을 하나 그렸다. 가장 아이다운 그림인 것이 입선의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무튼 그 그림으로 상을 받았다.      

자식들 공부를 핑계로 분가한 엄마는 고향의 친척들에게 보란 듯이 자랑했다. 덕분에 나는 지금도 친척들을 만나면 "야가 그림 잘 그리는 가가?" 소리를 들었다. 아무리 어렸어도 그 상이 잘 그려서 준 것이 아니란 것을 나도 알고 내 부모도 알았다. 내 부모는 자식의 재주가 메주임을(메주 미안!) 나만큼이나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내 부모는 고향을 떠나야 하는 정당성을 자식을 앞세워 그렇게 설명하고자 했을 뿐이다.     

   

똥 손이라더니 뭐야, 상까지 받았잖아,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전혀 아니다. 내 인생에 그림은 낙서로도 등장한 적이 없다. 이렇게 자세히 기억하는 것도 그만큼 내가 그림으로 상을 받는다는 것은 지나가는 소도 웃을 일이며 천지가 개벽되어도 다시없을 에피소드이기 때문이다. 그림 잘 그리는 아이라는 타이틀마저(친척들을 만날 때마다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까맣게 잊고 살았다. 내게 그림은 언제나 평균 점수를 와장창 깎아먹는 저주받은 과목이고 내 배는 똥배가 아니라 내 손은 똥 손을 되뇌게 하는 못난 자신의 대명사였다. 그렇다고 그림을 잘 그리는 게 부럽다거나 잘하고 싶다는 욕심도 없었다. 그만큼 그림은 나와 무관한 단어였다.       


그래도 '그림 잘 그리는 아이'라는 호칭을 엄마는 민망해하지 않았다. 왜냐면 우리 집에는 진짜 그림을 잘 그리는 딸, 언니가 있었으니까. 어른들이야 그게 언니든 나든 상관없으니까. 

포스터 같은 숙제는 언제나 언니 몫이었다. 내가 울상을 하고 도화지를 펼쳐놓고 있으면 으레 언니가 표어가 쓰인 어려운 부분을 색칠해주었다. 언니는 글씨도 잘 썼는데, 마치 찍어놓은 듯이 써서 매년 상장 쓰는 아이로 선생님께 불려 다녔다. 예전에는 인쇄가 아니라 손 글씨로 다 썼는데, 학교에서 글씨를 제일 잘 쓰는 선생님이 담당하곤 했다.

언니야말로 항상 그림을 그리는 아이였다. 공주 얼굴의 만화그림 말이다. 언니의 공책과 책 뒤편은 만화 그림으로 가득 찼다. 언니 옆에 배 깔고 누워 언니가 그림 그리는 것을 ‘보면서’ 같이 이야기를 꾸며내곤 했다. 우리는 온갖 공주 이야기를 지어냈다. 그림은 내게 딱 거기까지, 언니가 그리는 걸 보면서 내가 웃고 언니가 인형을 잘 그려서 참 좋다, 하는 그 정도로 남았다. 

        

거기까지인 줄 알았는데 또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5학년 미술 시간이었다. 미술시간에 크로키를 배웠다. 특징을 잡아서 빠르게 그리는 거라고 했다. 나는 당시에도(!) 내 얼굴에 대해 불만이 많았고 나쁜 쪽으로 특징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다른 아이들은 자신을 예쁘게 그리려고 애쓰고 있는데,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그냥 내 얼굴의 가장 싫은 부분을 과감히 그려버렸다. 얼굴을 길게, 눈을 쪽 찢어지게, 코 옆에 점까지 콕 찍어 그렸다.   

지나가던 선생님이 내 그림을 들고 바로 이거라고 칭찬을 했다. 선생님이 내 그림을 만인에게 보여주는 순간 너무 창피했다. 괜히 그렸다고 후회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칭찬이 좋았던 것 같다. 아직도 그 미술 선생님 얼굴을 기억하고 그런 그림을 크로키라고 한다는 걸 기억하는 걸 보면. 왜냐면 다시없었던 칭찬이기 때문이다. 칭찬은 상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그때 그 시간의 아이로 묶어놓고 성장하지 못하게 하는 면이 있다. 

인간은 참으로 본질적으로 한결같다. 각각의 경험이 나를 그렇게 만든 것인지 원래의 내가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지금도 특징을 잡아내는 것, 빠르게 간단히 그리는 것을 선호한다. 그림에 있어서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활동에서도 그런 편이다. 어쩌면 여전히 그 아이가 남아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림에 대해 추억할만한 것은 이게 전부다. 자라는 내내 그림이 싫었다. 미술 시간은 내게 지루함과 두려움과 낭패감과 무력감만 주었다. 크레파스는 투박해서 내 마음대로 색칠하기 힘들었고 수채화는 색을 섞을 줄 몰라서 짜증이 났다. 실기 시간마다 뭐 어쩌라는 건가 선생님이 원망스러웠고, 실기 점수는 항상 평균 이하를 맴돌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이제 미술 시간의 고역을 겪지 않아도 되어서 너무 좋았다. 안녕, 미술, 바이! 다시 만나지 말자~~진짜 끝이다!   


아! 말도 안 되는 추억이 또 생각났다. 무려 미술반이다.

대학에 가자마자 어이없게도 미술반 동아리에 들어갔다, 내발로. 입학하고 처음 사귄 친구가 꼬셨다. 자기도 전혀 그림을 그릴 줄 모르며 배우려고 가는 거라고 했다. 선배들이 가르쳐주기로 했다고, 같이 배우자고 했다. 순진하게도 그 말을 믿었다. 막상 들어가 보니 그곳에는 대부분 미대 입시를 준비해왔던, 한때 그림 좀 그리던 사람들이 그림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모인 곳이었다. 그들의 그림을 보기도 전에 그들에게서 풍겨오는 이질감에 몸을 떨었다. 가입하던 날부터 멀리 도망쳐 나왔다. 가끔 친구 찾으러 동아리실에 가도 문 앞에서 친구를 불러냈다. 다행히 그들도 내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멀어져 가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전시회 소식이 들려왔다. 신입생은 반드시 참여하라는 통보와 함께.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나는 선배의 말을 무시할 만큼 배짱 두둑한 인간이 못되었다. 그동안 전혀 관심 없던 선배들이 갑자기 엄근진(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해져서 신입생에 대한 군기를 잡으며 그림을 독촉했다.       


전형적인 머리형인 나는 머리를 쥐어짜 냈다. 이번에도 남들이 안 하는 걸 하자. 무엇을 할까. 그림이 아니라 조각을 할까? 손으로 하는 건 뭐든 못하는 똥 손인데 그림이 아니라 조각이라고 잘하겠는가. 하지만 내게는 기획력이라는 재주가 아주 조금 있어서 위기를 넘길 묘안을 짜낼 수 있었다. 오래된 일이라 자세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비누 같은 것으로 발을 조각했다. 왜 하필 발인지는 모르겠고, 하다 보니 발가락을 하나 더 만들어도 될 만큼 자리가 남아서 발가락 6개를 만들고는 본(本)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렇게 내 작품은 마치 설정이 그런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꽤 눈길을 받을 수 있었다. 크하하하.

전시회를 마치자마자 나는 곧바로 미술반을 탈퇴했다. 더 이상 내 실력이 드러나는 것도 싫고, 못하는 나를 직면하는 것도 싫었다. 그것도 오지게 못하는 나를. 만세, 해방이다!    


드디어, 마침내, 더 이상은 그림 때문에 시달리는 일 없이 살았다. 그 뒤로 아무리 심심한 회의시간에도 낙서 한 점 끄적여본 적이 없고, 유행이라는 다꾸(다이어리 꾸미기)도 하지 않았으며, 집안 인테리어나 예쁜 그릇에도 관심 없이 살았다. 심지어 이사할 때 벽지조차 내손으로 고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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