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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Oct 09. 2020

두려움이냐, 사랑이냐

붓을 들다

내가 그림을 그리겠다고 하자 전문가들이 나서서 한 마디씩 했다. 의외로 주변에 전문가가 많았다.     

-알고 있는 대로 그리지 말고 자세히 보고 보이는 대로 그려라.

-보이는 대로 그리면 눈의 왜곡에 속는 것이다. 사물이 가진 형태를 생각해라.    


-천천히 그려라. 선이 끝날 때까지 내 의지가 들어가야 한다.

-너무 의도대로 그리지 말고 자유롭게 그려라.  


-배우지 않으면 나쁜 습관을 들이게 된다.

-배울 필요 없다. 그냥 그리면 된다.   


-먼저 그려야 할 대상을 연필로 덩어리처럼 밑그림을 그려라.  

-밑그림 없이 지우개를 쓰지 말고 그려라.           

-선을 그으면서 힘의 강약 조절을 하는 것이 관건이다.  

-선의 강약은 스킬일 뿐이다.           

-선을 똑바로 그리는 것부터 연습해라.

-삐뚤어진 선도 느낌 있다.          

어쩌라는 건가. 도대체 누구 말이 옳은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보면 다 맞는 말이지만.  

여러 가지 조언들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걸러야 한다. 무엇이 옳으냐 하면, 내가 지금 따를 수 있는 것이 옳다. 멈추게 하는 말들을 폐기하고 지금 할 수 있겠다 싶은 모든 말들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아는 대로 그리지 말고 보이는 대로 그리라는 말을 따랐다가 보이는 대로 그리면 왜곡된다는 말을 증명해 보인 적이 있다. 생수병을 그렸다. 바로 코앞에 두고 그렸더니 시선의 각도에 따라 뚜껑은 동그랗게 윗면을 그리고 몸통은 옆면이 그려졌다. 대상을 너무 가까이 두고 그려서 생긴 문제였지만, 사물의 형태를 생각하면서 그리라는 말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지우개를 쓰지 말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어차피 다시 그어도 원하는 선이 나올지는 알 수 없다. 지나간 자리에는 자국이 남는다. 책상에서 아예 지우개를 없애버렸다. 한 번에 원하는 대로 그리려면 정확히 보고 본 대로 기억해서 천천히 그려야 한다. 하지만 연필을 들면 나도 모르게 일단 긋게 되었다. 연필은 다시 고칠 수 있는 믿음이 몸에 배었나 보다. 천천히 그려야 한다고 아무리 다짐해도 자꾸 서두르게 되었다. 조금은 머뭇거리게 하기 위해 먹물을 찍어 붓으로 그려봤다. 연필이나 펜이 가진 울퉁불퉁한 선(삐뚤빼뚤한 선이라기보다는 울퉁불퉁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이 없어지고 부드러운 선이 그어졌다.          

붓으로 그린다는 것은 선을 붓으로 긋는다는 의미이지, 색을 넣거나 명암을 넣는다는 뜻은 아니다. 오로지 선으로만 그렸다. 선은 형태였다. 내 눈에는 아직 명암이나 색채가 보이지 않았다. 형태를 보기에도 급급했다.

사람마다 눈이 이렇게 다를 줄 몰랐다. 단어와 글에 대한 민감도가 다르듯이 대상을 보는 눈의 민감도도 다르다. 어릴 때부터 인쇄물에 대한 집착이 있었기에 글자에 민감했다. 오탈자를 찾아내면서 쾌감을 느꼈다. 글자에는 민감하면서도 글자체는 구분도 하지 못했다. 역시 이미지에 대한 민감도가 없었다는 뜻이다. 민감도는 타고나는 것이지만 조금씩 훈련할수록 그동안 어떻게 이걸 몰랐을까 싶을 만큼 내게도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특히 사람의 얼굴에 관심을 가졌는데, 눈매, 입매, 옆얼굴의 콧날 등이 보이기 시작했다. 보인다는 것은 그릴 수도 있다는 뜻이다.           

똥 손이라면서 붓으로 그려? 생각할 수 있다. 각자 자신에게 맞는 도구가 있는 것 같다. 초보자가 제일 쉽게 접근한다는 색연필이 나는 제일 어렵다. 지금도 색연필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데, 진하게 칠하는 것이 안 된다. 검고 진한 먹물은 쓰면서 색연필을 진하게 쓰지 못하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어쨌든 내게 맞는 도구는 붓이다.      

붓으로 그리는 것을 보고 종이도 바꿔보라는 조언을 듣고 한지를 샀다. 그동안 집에 있는 이면지를 이용하거나 아이들이 쓰다 남긴 노트와 스케치북에 그렸다. 먹물로 한지에 그리니 그림의 맛이 살아났다. 내 그림이 제법 그럴듯해졌다. 연필로 그릴 때보다 훨씬 자신감이 생기고 자주, 많이 그리고 싶어졌다. 그래도 기본을 익히려면 연필로 그리는 것부터 익혀야 하지 않을까 잠시 망설였다. 잘하는 게 아니고 즐기는 걸 목적으로 하면 뭐든 상관없겠다고 내 마음대로 생각했다.      


목적이 바뀌자 그리고 싶다는 마음은 설렘과 함께 왔다. 드디어 진짜 초심으로 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림책을 좋아하는 마음이 그림을 그리게 했는데, 두려움 때문에 설렘을 잠시 잊었다. 무언가 힘든 일이 있을 때 왜 그런가를 돌이켜보면 언제나 두려움이라는 놈이 내 눈을 가리고 있다.

 "주저하는 이유가 사랑이냐 두려움이냐." 

어떤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 때마다 떠올리는 잠언이다. 어느 책에서 읽은 한 줄인데 평생 힘이 되어주었다. 망설임 앞에는 유난히 많은 이유가 줄 서있는데 주로 두려움과 짝을 지어 온다. 하지만 사랑이 있을 때는 아무것도 들러붙지 않는다. 하고 싶다는 마음이 신나서 춤을 추고 있다.

붓이 그어지는 느낌이 좋다.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이제 목적 따위는 상관없어졌다는 의미다. 좋아하는 순간을 많이 만드는 것만큼 중요한 삶의 목적은 없다. 그림을 그릴수록 그 사실이 더욱 분명해졌다. 아, 나 잘살고 있다.





 뉴스를 매일 챙겨보던 시절이라, 앵커 손석희가 내 눈에 들어왔다. 특징을 잘 살렸다고 지인들에게 칭찬을 많이 들었다. 칭찬해주신 분들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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