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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Oct 08. 2020

그냥 그려!

잘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마음 맞는 사람들과 그림책 모임을 했다. 내 손으로 그림책을 만들어보자는 목표로 시작했지만 대부분은 그저 그림책 이야기하는 것이 좋아서 나오는 사람들이었다. 나처럼 창작욕구만 앞선 사람은 없었다. 어쩌다 창작욕구가 있는 사람도 아직 아이가 너무 어려서 책상에 앉을 겨를이 없었다.            

마침 나는 두 아이 다 독립한 상태였다. 남편과는 주말부부 3년 차. 창작하기에 딱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다만 남편의 월급이 아쉬웠다. 혼자 벌어 넷이 사는, 요즘 같은 세상에서 기적 같은 일을 지금까지 근근이 남편이 해주었다. 이제 더 이상 나 몰라라 외면하면 안 되는 시기였다. 게다가 갑자기 창작이라니, 그게 돈이 나오나, 쌀이 나오나, 뭐 이런 말 없는 압력이 있었다. 하긴 창작은 아무나 하나. 그럼에도 내 마음은 콩밭에 가있었으니 어쩌겠는가. 온 마음을 다해 그림책을 만들어 보는 수밖에.       


이야기를 만들어 더미북을 만들고 출판사에 기고한다, 는 것이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만든다는 1단계부터 진전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그림책을 좋아한다고 해도 그동안 그림책을 만드는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이라고는 1도 없이, 100% 독자의 입장으로 그림책을 보아왔는데 어떻게 갑자기 이야기가 뚝딱 만들어지겠는가. 그 정도 능력이 있었으면 이미 내가 무엇이 되어도 되었겠지.           

다행히 그림책 모임의 멤버들은 나처럼 무모하지도, 성질 급하지도 않았다. 그림책 러버의 순수한 마음으로 그림책을 사랑했고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몸으로 알고 있었다. 조급해하는 나를 끈기 있게 다독여주었다.

나는 그들과 그림책을 사랑하는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면, 혼자 그림책을 연구했다. 처음에는 그림책 내용을 그대로 필사했다. 따라 쓰다 보니 작가의 시선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이 많이 드러났다. 그것들을 메모하고 그 느낌 그대로 내 이야기를 만들어 보기도 했다. 한 작가를 좋아하면 필체가 닮아간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림책 구성이나 필체를 흉내 내 볼 수 있었다.      

필사는 이야기의 많은 부분을 캐치할 수 있게 해 주었지만 동시에 답답하게 했다. 그림으로 하는 이야기들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림에서 느껴지는 것들을 메모해봤지만 도저히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림을 따라 그려 보면 어떨까 싶었다. 하지만 그림을 따라 그리는 것이 가능했다면 어릴 때 언니 따라, 만화책 보며 나도 조금은 따라 하지 않았을까. 따라 그리려고 종이를 펴보았지만 도대체 어디부터 선을 그어야 할지 막막했다.      

    

내가 얼마나 복이 많은 사람인가 하면, 그림책 모임 멤버 중 두 명이 화실을 운영하는 전공자였다. 그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마침 그들은 <아티스트 웨이>라는 책에 매료되어 있었다. 12주간 그림 그리기를 권했고, 그 방법을 가르쳐주었다(고 하기에는 몹시 단순하다. 그냥 옆에 있는 사물을 보이는 그대로 그리라는 것이다.) 잘 안되면 자신의 화실에 오라고 했다. 같이 있으면 뭐라도 도움이 되지 않겠냐면서. 두어 번 그들의 화실에 갔다. 그곳에서도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왜냐면 나의 막막함은 연필을 어떻게 종이에 그어야 할지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내 첫 그림책을 그려줄 그림 작가로 마음으로 점찍어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니 얼굴> 그리는 정은혜 작가다. 엄마 장차현실 씨와의 인연으로 그녀의 그림에 대해 전해 ‘듣고’ 있었다. 어느 날 정은혜 씨가 그림 전시회를 한다기에 내 그림책을 미리 청탁할 겸 겸사겸사 양평으로 갔다.

그녀의 그림을 보았다. 그녀의 그림은 뭐랄까, 두려움이 없었다. 상대나 자신, 관람자의 시선 따위 상관하지 않았다. 그림에 대한 선입견을 완전히 깨부수는 그림이었다. 내 눈에는 이렇게 보여, 나는 이렇게 그려, 나는 달라! 그런 배짱이 느껴졌다.

그녀의 그림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나도 그림을 그리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저런 것이 그림이라면 나도 그려보고 싶었다. 이제 연필을 종이에 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그림이 만만해 보였다는 뜻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녀의 그림은 절대 남들이 흉내 낼 수 없는, 누가 봐도 은혜 씨의 그림이었다. 나도 나의 그림을 그리고 싶다! 그런 마음이 들었다. 더구나 그녀의 그림은 잘 그리려거나 잘 그린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기술'이 없었다. 것이 나를 '잘 그려야한다'는 강박에서 벗어게 해 주었다. 그냥 연필을 그으면 된다. 당연하지만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던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굴의 아이>라는 책이 있다. 문성식이라는 화가의 드로잉 에세이 북이다. 그의 그림도 그렇다. 어렵지 않다. 커다란 굴을 연필로 까맣게 칠해 놨다. 가운데 구멍, 굴의 끄트머리에 있는 출구가 작게 그려져 있고, 그 앞에 아이가 서있다. 당연히 뒷모습이다. 까맣게 무서운 굴 앞에서 들어가지 못하고 서있는 겁 많은 아이. 그가 말하고 싶은 전부가 그대로 전달되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잘하는 사람은 복잡하게 하지 않는다. 단순하다. 인생도 그렇다. 잘 사는 사람은 단순하게 산다.     


아마 내가 연필을 종이에 대지 못했던 것은 '남들처럼 잘' 그려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멋진 그림처럼 흉내내려다보니 아예 손을 대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살면서 절대 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 것을 시작하는 건데, 나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인데 잘될 리가 있나. 그림은 어쩌면 기술보다 배짱이 필요한 게 아닐까 싶다.  

사람은 태어나서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엄마 젖을 찾아 문다. 주지 않으면 운다. 아무도 어떻게 젖을 먹는 거냐고 물어보지 않는다. 그냥 찾아 물고 있는 힘껏 빤다. 그게 전부다. 눈에 보이는 대로 엄마 아빠와 다른 사람들을 구분하고 들리는 대로 엄마, 아빠를 소리 내어 따라하면서 말을 배운다. 남들처럼 넘어지고 넘어지면서 일어나 걷는다. 나도 그렇게 먹고 배우고 자랐으면서 그림 앞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엄살이다.

그러고 보니 어디서 많이 본 상황이다. 엄마들이 아이에게 맨날 하는 말, 일단 읽어. 읽다 보면 이해가 돼. 일단 풀어. 풀다 보면 이해가 돼. 허허... 나도 아들에게 그 말을 자주 했다.   

물론 잘하는 건 다르다. 은혜 씨는 3천 명의 얼굴을 그렸다고 한다. 문성식 님은 세세한 묘사로 가학적이라고 할 만큼 몸을 갈아 넣어 그린다. 그러니 일단, 그려! 그리다 보면 잘... 은 모르겠고, 그릴 수는 있겠지.

       

아티스트 웨이 때 그린 그림들은 기록해 둔 것이 없다. 대신 전쟁의 고통을 그림책으로 많이 남기신 토미 웅거러 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려본 그림을 하나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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