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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Oct 12. 2020

지금은 안되지만 언젠가는 되겠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하나의 그림


매일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다. 매일 그림을 그리니까, 매일 나 자신이 기특해 죽겠다. 

시작은 좀 어렵다. 아침마다 책상에 앉기까지가 문제다. 도살장 끌려가는 소마냥 온갖 핑계를 대고 딴짓을 한다. 화장실도 한 번 더 가고 물도 한 번 더 먹으면서 어떻게든 시간을 미룬다. 그러다 일단 앉고 나면 그림이 시작되고 마무리를 짓게 된다.

물론 중간에 망쳤다는 생각에 다시 그릴까 말까를 세 번쯤 반복한다. 그래도 절대 멈추지 말고 끝까지 마무리하라는 조언을 따른다. 어라, 너무 크게 그렸나? 종이가 모자랄 것 같으면 구도를 바꾸는 거다. 에구, 코가 너무 커졌네, 그럼 주먹코였던 걸로 하지 뭐. 잘생겼던 모델은 어느새 개성 있는 얼굴이 되어버리고 중앙에 자리 잡는 평범했던 구도는 한쪽으로 치우쳐 독특하고 자유로운 분할을 만들어낸다.

그래, 원래 계획한 대로 살아지는 인생이 어디 있나. 살다 보니 그리 됐다, 하고 사는 거지. 인륜지대사라는 결혼도 어쩌다 하룻밤 때문에 이루어지고, 무계획이었던 자녀계획도 찢어진 콘돔 때문에 다자녀 애국자가 되기도 하는 것 아닌가. 너를 낳지 않았음 어쩔 뻔했냐, 하는 기특한 늦둥이 얘기들이 차고 넘치는 세상이다. 생각했던 대로 살아지지는 않아도 어쨌든 인생은 살아진다. 그림도 원래 생각했던 구도대로 완성되지 않을 뿐 어쨌든 완성되어있다.


게다가 나 자신이 기특하다니.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을 쓰담 쓰담한다. 매일 그림을 그리면서 매일 나 자신을 기특하게 여기는 순간을 맛본다. 이토록 나 자신을 사랑하는 시기가 내 생전 없었다. 이거야말로 대박 아닌가.

갱년기가 되면 순식간에 내가 가진 역량이 반으로 줄어드는 기적 같은 절망을 체험한다. 늘 쓰던 낱말이 생각이 안 나고 대화에 대한 육체적 정신적 반응속도도 현저히 느려지고 다른 신체 감각도 무뎌진다...

평소 잠이 너무 많아 별명이 잠만보였던 내가 잠자는 능력조차 반으로 줄어들었다. 하루 에너지 총량을 잘 조절해서 밤에 잘 수 있는 에너지를 따로 비축해야 한다. 이게 말이 되냐고. 잠은 그냥 누우면 되는 거 아니었냐고.

먹는 것도 마찬가지다. 야식은 당연한 끼니처럼 먹었는데 어느 날부터 저녁 9시에 바나나 하나를 먹고 소화를 못 시켜서 거실을 런지로 걸어 다닌다. 딱히 먹고 싶었던 건 아니었어, 그냥 하나쯤 먹어야 잘 힘이 생기지 않을까 싶었을 뿐이라고, 중얼거리면서. 이렇게 모든 것이 한심해지는 우울한 시절에 내가 기특해지는 순간을 매일 맞이하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물론 잘해서는 아니다. '잘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재밌으려고 하는 거야!'라고 책상머리에 써붙여놨다. 결과물의 만족도와 상관없이 오늘도 해냈다는 사실 자체가 내게는 기특한 것이다. 만일 내가 원래 그림을 좀 그렸던 사람이라면, 아니면 잘 그릴 거라는 기대를 계속 가졌더라면 이런 순간을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더 잘 그리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고 스스로 채찍질했겠지.

하지만 나는 내 인생에 절대 없을, 절대 하지 않을 일에 도전한 것이다. 지금의 나는 마치 처음 걸음마를 배우려고 발을 떼는 아기를 보는 심정이다. 한발 걷고 넘어지고 또 두 발 걷고 넘어져도 박수를 치고 좋아라 하는 부모처럼, 내게 박수를 친다. 사실 돌이 한참 지난 아기에게는 그렇게 환호하지 않는다. 불안했던 마음이 다행으로 바뀌는 정도다. 나는 돌이 지나도 50번을 지났건만 왜 이리 자신에게 환호하는 건지. 그림에 대해서만큼은 3년이 지나도 돌쟁이도 안 된 갓난쟁이로 여겨진다. 이번에도 해내는 내가 대견하다. 책상에만 앉고 나면 대견해지는 인생이라니 멋지지 않은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나는 루프스 환자다. 자가면역질환으로 햇빛이나 온도가 증상을 악화시킨다. 종일 그림 그린답시고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지만 만병의 근원인 스트레스가 문제다. 내 머릿속은 온통 스트레스, 그러니까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욕망이라니, 스트레스라니. 잘하려는 욕심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물론이다. 하지만 스트레스라는 놈은 지나친 기쁨도 자극을 준단다. 지나치게 기뻐하지도 지나치게 슬퍼하지도 지나치게 노여워하지도 말라는 한의사 선생님 말씀을 들으며 껄껄 웃었다. 도인이 되라는 거 아닌가. 어쨌든 그것은 마음의 문제다. 그림은 죄가 없다.


하루에 단 하나의 그림만 그리기로 했다. 아침이면 그려야 할 대상을 하나 정해놓고 밥 먹고 보고 차 마시고 또 보고, 잊었다가 다시 보고 또 보고, 손가락으로 그려봤다가 머리로 그려봤다가, 그렇게 종일 노는 거다. 10분이면 끝날 그림을(그릴 줄 모르면 뭘 더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오래 걸리지 않는다.) 하루 종일 걸려 그린다. 무료하게, 별일 없이, 걸려 넘어지지 않게 그렇게 하루해가 지기도 하는구나, 심상해하면서. 그것도 머리를 쓰는 거라 수시로 머리를 비워야 한다. 그림 생각에 바빠서 헛생각에 빠질 틈이 없는 게 다행이었다. 삶이 단순해졌다. 친구와의 만남이나 번잡한 일들을 다 접어두고 고독할 만큼 자신을 고립시켰다.        

걸음마 배우는 아기처럼 환호한다고 했지만 아기는 걸음마를 배우기 위해 수없이 넘어진다. 그림을 잘 그리기 위해서도 수없이 실패하고 잘 그릴 때까지 계속 그리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 방법에 반대다. 아이는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지만 살만큼 살아온 우리는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기 싫다. 왜 그려야 하나, 되물을 것이고 싫으면 안 하고 싶어진다. 그림에 재능도 없고 감각도 없고 배운 적도 없는 내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무슨 효용가치가 있나, 회의가 들면 끝이다.

넘어지지 말고 다치지 말고 가만히 시간을 들이는 것. 나이 든 우리가, 그것도 나처럼 지병 있는 어른이(지병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남들과 다른 사연 하나쯤 있지 않은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길은 그것뿐이다.  

오래오래 바라보며 마음에 두는 것. 지금은 안 되지만 언젠가는 되리라 믿는 것. 지금의 선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는 것. 못하지만 하는 사람이 되는 것. 그렇게 살아도 무탈하다.  






인물화 책을 보며 따라 그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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