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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Aug 20. 2024

화려함을 앞둔 맨드라미

 

오랜만에 후배 H와 긴 통화를 했다. 근황을 묻기에 수영이야기를 신나게 했더니 역도를 하는 그녀는 운동이 주는 만족감에 대해 깊이 공감해 주었다.

그리고 최근에 겪고 있는 갱년기 증상에 대해 고민을 털어놓았다. 이 더위에 머릿속에 수도꼭지가 달렸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땀을 줄줄 흘린다고 한다. 게다가 사람들 말을 자꾸만 놓쳐서 잔소리를 반복해서 들으니 자존감이 떨어질 정도라고 한다.


분명히 듣고 있는데 머릿속에 남지 않거나 전혀 집중을 못하고 붕 떠있는 상태, 당연히 나도 그런 증상을 겪었다. 너무 귀찮았다. 관심 있던 일들도 다 귀찮아서 놓아버렸고 관심 없던 일은 아예 술술 빠져나갔다. 나는 그녀처럼 주의력을 다잡으려고 노력하느라 자존감이 떨어지기보다는 다 내려놓는 쪽을 택했다.

흔히 ‘내려놓는다’는 말은 내 뜻대로 하려고 애쓰지 말라는 의미로 쓰이는데, 갱년기 즈음에서 내려놓는다는 말은 어제 하던 일이 오늘도 된다는 착각을 내려놓으라는 의미가 되어버린다.  

사실은 내려놓기보다는 빼앗긴다는 말이 더 적절하다. 누군가 뺏어간 것처럼 에너지가 훅 떨어져서 내 몸 하나 추스르기도 벅차다. 아니, 에너지가 떨어졌다는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하는 게 더 슬프다. 땀을 줄줄 흘릴 정도로 눈에 띄게 몸에 신호를 주는데도 우리는 그 신호를 읽지 못하고 여전히 어제처럼 할 일을 다하려 안간힘을 쓴다.  

     

나는 그녀에게 ‘몸을 돌보는 시간’을 선포하라고 했다. 당분간  일을 줄이고 만나는 사람을 줄이고 가급적 하루에 하나만 하고 살 것. 내가 왜 이러지? 자신을 탓하지 말고 그래도 괜찮다, 자신에 충분히 너그러울 것. 

수영을 새로 시작했을 때, 수영하는 시간은 한 시간이지만 너무 피곤해도 하루종일 늘어져있느라 아무것도 못했다. 그래, 수영에 익숙해질 때까지 수영만 하자. 적어도 이번 달은 수영하는 달이니까 다른 건 아무것도 하지 말자, 마음먹었다. 그렇다고 실제로 수영만 할 수는 없다. 밥도 해먹고 일도 하고 글도 쓴다. 그럴 때마다 나를 칭찬하는 거다. 수영하고도 밥을 잘해먹었네, 수영하고도 글도 썼네 등. 그렇게 나에게 너그러워지는 거다.   

그랬더니 그녀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예전에는 괜찮았던 말들이 듣기 싫고 불편하다고. 자신에게 너그럽지 않을 뿐 아니라 남에게도 너그러워지지 않아서 괴팍한 늙은이가 될까 걱정이라고.

그 또한 에포케, 판단중지를 하라고 권했다. 나에 대한 판단 금지, 남에 대한 판단 금지, 미래에 대한 판단 금지. 오로지 지금의 내 몸과 마음, 현실에만 집중할 것. 불편한 사람은 당분간 거리를 둘 것. 어차피 껍데기만 그 사람 앞에 두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까. 우리에게 지금 그런 휴지기가 필요한 거라고. 누구나 비슷한 시기를 겪 거라고.


갱년기는 사춘기와 꼭 반대로 가는 시기여서 몸과 마음의 질풍노도를 겪는다. 사춘기가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면 갱년기는 노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몸을 받아들이는 시기다. 수명이 길어지면서 당장 노인으로 살지는 않고 긴 중년의 시기를 건너야 하지만 그럼에도 이전과는 다른 몸이 되어 폐경을 겪고 다시 갱, 갱년을 맞이해야 한다. 여기저기 관절이 삐끄덕거리는 걸 생각하면 과연 다시 갱이 가능할까 싶지만, 갱년기를 잘 보낸 언니들 말에 의하면 다시 1학년이 되는 시기가 온다고 한다. 그 말은 다시 건강해지는 것과는 다르단다. 다른 몸에 익숙해지는 거다(갱년기에 운동을 하면 운동을 한 몸에 익숙해질 수 있는 기회가 오는 거니까 '새로운 몸'이라고 해도 무관하지 않을까).

예전에 사춘기가 없었듯이 갱년기도 아직은 그 의미에 대한 데이터가 부족해서(긴 중년을 맞는 첫 세대라서) 갱년기를 갱년기라 말 못 하는(갱년기를 부정하고 의학적인 폐경이나 빈 둥지 증후군 등으로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회적 분위기가 있다. 그러니 먼저 겪은 우리들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 각자의 갱년기에 대해 더 많이 발화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 외국에서는 관련 책들이 많이 나오는 것 같은데 우리와는 문화적으로 많은 부분이 달라서 그대로 대입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면, 섹스에 대한 것이 그렇다.     

 

관련하여 H와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다, 하루빨리 보건소 등 공적기관에서 갱년기 여성의 건강에 대한 교육과 홍보가 제대로 시행되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먼저 겪은 사람으로서, 우리의 딸들은 우리의 몸과 생애주기를 우리처럼 주변 사람들을 통해 알음알음 알아가는 방식이 아니라 공적이고 체계적으로 관리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맨드라미는 가을이 되어 밤 기온이 떨어지면 꽃색이 더욱 화려해지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갱년기를 겪는 우리도 더욱 화려한 시절을 맞기도 한다.

H야, 진짜야. 언니 말 믿지? 그날이 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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